나의 고향 `성주!`. 성주라는 이름은 신라 본피현으로 시작하여 신안현, 경산부 등을 거쳐 1308년에는 조곡산에 어태(御胎)가 안치됐을 땐 성주목으로 격상됐다.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는 동안 8번의 군명이 바뀌어 지금은 성주군이 되었다. 그런데 처음 이름이 본피현인데, 신라시대 씨족 중심으로 행정 구역을 6부로 나눌 때 사량부, 본피部 등이 있었고 이 본피부가 우리 성주의 본피현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곧 생기기도 했다.
옛 행정구역인 주군현(州郡縣)에서 `州`의 의미는 좀 다르다. 경상도의 경은 경주의 `경`과 상주의 `주`를 취해 경상도가 된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주의 `주`도 그런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아 자그만 자존심을 가졌다. 더구나 우리 성주가 한때 대구府 일부와 북으로는 충청도 일부까지 광역 웅도일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일전, 지난 2018년 8월 15일에 `독립유공자 건국포장`을 받은 최은동(崔殷東) 절충장군의 구지(舊址)를 보러 법산을 갔다. 구지를 돌아보고 오는 길목 마을 몇 곳을 보니 하도 많이 변해 마음이 무거웠다.
6·25전쟁 후 산업화로 가기 전 농업이 주산업일 때는 인구도 폭증하여 120여 호도 넘는 우리 영천최문 집성촌이었다. 집터가 없어 깊은 개골창 언덕을 벽을 삼아 움막을 지어 살던, 가난한 사람도 있었던 법산이 지금은 7,80호도 되지 않을 만큼 공가와 폐가가 보이니 그야말로 금석지감이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초가삼간, 고색이 창연한 전통의 기와집 등은 산업화 이전까지는 모두 온전했는데 지금은 고택도 헐고 산뜻한 현대식(양옥)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양은 번듯하지만 뭔지 모를 옛 정서가 묻혀져버려 못내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음도 사실이다. 좁디좁은 골목길, 다닥다닥 붙어 있던 초막들 사진이라도 찍어뒀으면 마을 500년의 역사 중 근세의 아주 조그만 `마을 연혁(沿革)`이라도 보존할 것인데, 좀 아쉽기도 하다.
나의 복지(卜地)였던 지금의 집은, 1800년대에 종조부가 지은 초가를 150여 년간이나 후손들이 사용하다 1962년에 헐고 새로 지은 기와집이다. 그 집 헐 때 보니 순전히 흙, 돌, 새끼와 나뭇가지, 꼬불꼬불한 서까래가 전부였다. 할아버지껜 죄송하지만 `토굴(토담집)`에 다름아니었다. 그래서 새로 지은 기와집을 60여 년이나 살았지만 공가가 된 지 5,6년이 됐으니 마당엔 잡초가 자라 몸채 사랑채 모두를 가릴 지경이었다. 숲 속에 집채가 서있는 형국이었다.
농사(논 30여 마지기)철의 타작마당은 흉·풍과 무관하게 `웃음 가득`이었던 마당에 웬 잡초라니, 우선 기가 막혔다. 보리, 나락 타작을 위해 황토와 진흙을 섞어 다져 평토 작업을 한다. 그래 논마당을 얼마나 깨끗이 했으면 `찰밥 뭉치를 굴려도 티끌 하나 묻지 않는다` 했을까. 그런 마당이 한 질 키의 잡초라니? 집 도량을 돌아봤더니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뒤안은 대나무만 무성하였고, 몇 그루 서 있었던 상수리나무는 한껏 자란 대나무에 치여 숨도 헐떡이는 것 같았다. 이런 현상을 `역사의 변전`이라 하는 건가? 참 서글픈 변전이었다. 넓은 의미의 인류 역사도 이런 과정을 거쳤을까···?
우리 법산은 `기와집 많은 동네`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많던 기와집이 많이 사라진 것도 문제지만, 예닐곱 명의 고용인(머슴)으로 광농을 하던 한 부잣집이 사라진 것이 더 충격이었다. 그 집은 조선시대 후궁들이 기거하던 서울 궁정동 `칠궁(七宮)`을 연상할 만큼의 솟을대문에 몸채, 사랑채 등 여섯 채가 있는 대가였는데 말이다.
그 가주(家主)의 풍채를 굳이 말해야 한다면, 항상 한 점 흐트러짐도 없이 위의를 갖춰 지팡이를 짚고 삼복에도 도포정장(道袍正裝)이 일상복인 분이었다. 장대한 체구에 은백색의 수발(鬚髮)은 바로 조선 사대부의 위엄과 기품이었으며 그 틀거지에 누구도 압도당하고 만다. 빙기옥골(氷肌玉骨)은 이 분의 비유는 아닐까···? 게다가 성량(聲量)은 중후하여 만일 군중 앞에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한다면 그 위용에 군중을 휘어잡을, 일세를 풍미할 대정객의 풍의임이 분명했다. 더구나 출류발군(出類拔群)의 경세가였으며 유학자로서의 정연한 덕량에 모두 감응하는 유현(儒賢)이었다. 이런 분이 있어 우리 법산최문이 명가였다고 온 유림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고인이 된 지 오래지만 생전에 삼남의 네 군데(도산, 고산, 병산, 옥천) 서원장을 역임할 만큼의 근현대사의 대유학자였다. 사후 장례 시에는 호상자만 천여 명이 호종을 했으니 여기 첨언을 하면 사족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런 분의 고택이 훼철되어 군데군데 수풀이 우거지고 못다 치운 잔해들이 자그만 동산을 이뤘으니 탄식밖에 나올 게 없었다. 길가 담장만 겨우 부지해 있고 그나마 솟을대문만 만신창이(?)가 된 채 서 있었다. 길재의 시조 `5백년 도읍지···`를 무색케 하고 있었다. 역사의 변전은 이렇게 혹독하다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한 `여정`이라 해야 할까? 감히 나는 `생사와 흥망이 무상`이라고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와 내 집을 보니 그 집보다 내 집이 더 걱정이었다. `제 앞가림이나 하라`는 질책이 정곡을 찔렀다. 어른들 계실 때 구축한 보금자리를 당대에도 유지를 못 하다니 이런 불효가 어디 있으며 그 죄민함을 감출 길이 없다. 세태의 변전만을 원망할 일은 정녕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