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는 고려 명장 윤관의 후손으로 1918년 충남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고, 오치서숙(烏峙書熟)에 들어가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과 결혼하고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후 농촌계몽 활동을 하다가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다.   상하이에서 채소 장사를 하다가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 선생을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한국애국단에 가입한다. 김구 선생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왕의 생일연(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기념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했다. 이 행사에는 점심이 제공되지 않으므로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각자 도시락을 지참하기로 되어 있어 폭탄을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두 개를 제작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잠입한 후 11시가 되자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해 상하이 주재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고 외교관과 내빈이 돌아간 뒤 일본인들만 남아서 상하이 점령 축하연을 벌였다. 11시 50분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 경축대 위해서 폭탄이 명중했다. 그래서 자결용의 도시락 폭탄을 터뜨렸으나 불발했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구타를 당하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폭탄에 의해 총사령과 시라카와 대장과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이 죽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실명되고,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중 공사 시게미쓰 다모투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당시 중화민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윤봉길의 거사 소식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24세의 청년 윤봉길이 홀로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수뇌를 괴멸시킨 것에 대해 자기 휘하 100만 중국군이 이룰 수 없는 일을 한국 청년 한 명이 해냈다고 극찬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 그동안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게 됐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한국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의 의거에 있었다"고 평가했다.   2차 대전 말 일본의 폐색이 짙어지던 1943년 11월 21일부터 27일까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그리고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열고 전후 세계 질서를 위한 카이로 선언문을 발표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일본이 강탈 또는 무력으로 점령한 영토를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 선언문에서 우리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명문화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의 개인 회담은 23일, 25일 두 차례 열렸는데 두 회담에서 모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무력으로 병합한 류쿠제도(오키나와제도)를 중국이 원한다면 옛날 류큐왕국이 조공을 바쳤던 중국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장제스 총통은 류큐제도는 미국과 중국이 공동 신탁통치를 하자고 하면서 한국의 독립에 대해 역설했다.   카이로 회담이 열리기 직전 7월 26일 장제스 총통은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 선생을 불러 접견하고 한국의 완전 독립, 국제 공동관리에 의한 신탁통치 반대 등 상해 임시정부의 요구조건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카이로 회담이 열린 첫날이던 11월 22일 장제스 총통은 카이로에서 자신의 일기장에서 종전 후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제안할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스탠포드대 후버연구소 소장 장제스 일기장). 그리고 그는 실제로 회담 석상에서 한국을 신탁통치하자는 영국 처칠 수상의 제안을 일축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문에 명문화시켰다.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우리에게 잃어버린 빛을 회복할 능력이 있었던가? 연합국의 승리로 광복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광복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 아니다. 류큐왕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윤봉길 의사처럼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 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아갈 이 땅, 올해로 광복·분단 75년을 맞는다. 그런데도 주변 강대국들은 한반도 분단을 자국 이익에 이용하려고만 들고,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통일·평화를 말로만 하지, 민족의 화해와 통일,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정치) 생명을 걸고 나서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 현실을 바라보며 한숨만 짓지 말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대한 절절한 소망과 꿈을 가지고 이제 우리 국민 모두가 직접 나서자. 우리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조상이 되고 싶다면, 통일도 평화도 거저 주어지는 것 아니다.
최종편집:2024-05-16 오후 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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