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도정(雙島亭) 이야기 1
요즘 고향 성주 얘기를 하자면 `성주 역사테마공원`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름대로 웅장하게 쌓아올린 성주 읍성(星州邑城), 그리고 아담하게 복원한 북문(北門)과 사고(史庫), 새롭게 조성한 비림(碑林) 등 거기다가 쌍도정(雙島亭)을 완전한 복원까지 해 놨으니 역사테마공원으로써 그리 크지 않는 규모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한번 돌아볼 만하다.
어떻게 보면 쌍도정이 그곳에 자리한 것은 약간은 어색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잘 어울릴 것이라 기대한다.
성주에서 자라면서 각산(角山. 지금의 성주여중고, 와우산·남정산이라고도 함) 아래 연못에 쌍도정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의 어릴 적 일이지만, 지금의 관운사 자리에 관음사가 있었고 관음사 대웅전이 관운장을 모셨던 유서 깊은 관왕묘(關王廟)였다는것, 이 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 한가운데에 아주 훌륭한 정자가 있었던 것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마 이 정자를 지을 때는 옛날 쌍도정이 있었던 얘기들이 오고 갔으리라.
내가 쌍도정 얘기를 처음 들었던 것은 2013년 9월 어느 날 재경성주문화사업후원회 회장을 맡아 봉사하던 무렵 사석에서 전 내무부 장관을 지내셨던 이상희 선배님으로부터 처음 들었다.
그때 말씀이 "물론 흔적도 없는 쌍도정이지만 그 옛날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쌍도정도(雙島亭圖)란 그림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느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그림을 찾아서 성주에 가져와야 되지 않겠는가?"란 말씀이었다.
그때 생각으로 `겸재 그림이면 보물급 작품이라서 가격도 엄청날 텐데 어떻게 구입을 하겠는가?`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면 한번 도전해 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의욕적인 생각도 했었다.
당시는 후원회 회원들의 열정도 있었고 응집력도 대단했다.
이와 같은 마음을 품고, 겸재 그림이라면 먼저 서울 간송미술관이나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을 수 있으니 알아보고, 거기에 없으면 개인이 소장하고 있을 것 이라는 전문가의 충고를 참고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간송미술관이나 호암미술관을 찾아다녔다. (사실은 간송미술관은 당시 1년에 1회 가을에만 일반에게 개방할 때라 기회가 적었고, 호암미술관은 에버랜드에 자리하고 있어 거리 관계로 쉽게 갈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까운 이태원 소재 `삼성 리움 미술관(Leeum)`을 가끔 찾았었다.
운이 좋았던지 2014년 12월 9일 두 번째 찾았을 때 리움 미술관 1층의 조용한 위치에 걸려있는 그리 크지 않는 크기(34.7x26.4cm)의 `겸재 쌍도정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원화의 소재는 확인했으나 리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한, 매입의 욕심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감동을 함께하기 위해 성주문화원에 연락해서 성주문화원장(이시웅), 부원장(도일회), 성주군 문화과장(박재범), 북비고택의 이수학 선생을 위시한 몇 분의 문화 관련 유지님들을 초청했고, 서울에 계시는 이상희·이윤기·최열곤·이하영·배경운·김동태 고문을 위시한 후원회 회원 여러분을 모시고 겸재 정선의 쌍도정도를 관람하였다.
그날 이수빈 고문(삼성생명 회장)이 베풀어 주신 탐방 환영 오찬모임을 성대하게 가졌었던 일이 아직도 고마운 마음으로 남아있다.
쌍도정(雙島亭) 이야기 2
지금 성주에 `겸재의 쌍도정도`의 확대 복사본이 성주문화원에, 또 관운사에 걸려 있어 다행히 쌍도정도가 어떤 것인지 우리가 지금 감상할 수 있다.
참고로 성주문화원에 걸려 있는 설명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성주관아의 객사인 백화헌의 남쪽 연못에 있던 정자를 그린 그림이다. 네모꼴의 연못 속에 석축으로 둘러싼 2개의 섬이 조성되어 있어 쌍도정이라 칭한다.
왼쪽 섬에는 나무만 심겨져 있지만 오른쪽 섬에는 정자가 설치되어 있는 아름다운 모습인데 겸재 정선이 40대 후반에 그린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되며, 이 쌍도정의 조성은 고산 윤선도가 성주목사 재임시절(1634-1635)과 관련 있다고 추측한다.
쌍도정의 위치는 현재 성주읍 경산리 관운사 앞에 있던 연못으로 추측하고 있다. 지금은 성주읍성 북문 밖 성주역사테마공원에 고증을 거쳐서 복원되어 있다.
겸재가 40대 후반부터 경상도에서 활발하게 그림을 그렸는데 하양 현감 시절과 청하 현감 시절, 두 번의 시기를 얘기하고 있다.
첫 번째 시기는 하양 현감 때이다.
1721년에 겸재가 처음으로 한양을 떠나 하양 현감이 되어 내려왔는데 이 무렵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서 겸재가 의지해 왔던 주변(老論)이 큰 화를 입었다. 3년 뒤(1724년) 경종이 돌아가시고 소론이 쇠멸되고 노론이 복귀되어 함께 글공부를 하던 조영복이 경상감사로 내려와 겸재가 다시 힘을 얻어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정선이 경상도에 있는 65개 군현(郡縣)을 일일이 다니면서 현장에서 느꼈던 흥분과 감동을 신명나게 그렸는데 그것이 바로 `영남첩(嶺南帖)`이다. 오늘날 아쉽게도 `영남첩`은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있다.
두 번째 시기는 청하(淸河) 현감 때이다.
정선이 하양 현감을 마치고 한양에 올라와 별좌의 벼슬에 있었는데, 영조 임금이 지난날 대군(연잉군) 시절 이웃해서 가깝게 지냈던 인연으로 정선 나이 57세(1733)에 경상도 청하 현감으로 내려 보냈다.
`영남첩` 그릴 때의 추억이 담겨있는 곳곳을 찾아다니며 그린 것이 석류굴, 내연산 삼용추, 해인사, 두줄기 시내가 만나는 곳의 선바위 등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석류굴은 명품중의 명품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석좌교수이신 홍선표 교수의 저서 `조선회화(朝鮮繪畵)`에 쌍도정도를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40대 후반 하양 현감시절 그린 `쌍도정도`와 50대 후반 청하 현감시절 그린 `내연산 삼용추`의 두 그림에서 필치의 다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정선의 중요작품으로 평가하는 듯 하다.
쌍도정(雙島亭) 이야기 3
쌍도정을 그린 정선은 어려운 사족의 후손 이었다.
정선의 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겸재(謙齋)가 있고 또 난곡(蘭谷)이라는 호도 있다. 자는 원백(元伯)이라 했다.
13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조부의 도움으로 성장했는데 다행히 외갓집이 있는 백악산(현 북악산) 부근에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이 살고 있었다.
김수항은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 창립 6창이라 부르는 6형제를 뒀는데 정선에게는 이들이 스승이었고 정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고 한다.
정선은 김창흡 문하에서 글을 배우면서 좋아하는 그림을 그렸다.
1712년 김창집이 사신이 되어 청나라 연경으로 떠났는데 아우 창업이 형님을 보필하여 함께 떠나면서 당시 조선에서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가져가서 안목이 뛰어난 청나라 사람들에게 보였던 바, 당시 조선화가들의 그림 중 정선의 그림을 으뜸이라 했다고 한다. 정선이 37세 때이다.
이때부터 정선이 뛰어난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1713년 정선이 38세 때 김창집이 추천을 해서 처음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오른 벼슬길이 1721년에 하양 현감으로 한양을 떠나게 되었다.
하양 현감으로 있을 동안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신임사화가 일어났고 이때에 영의정으로 있던 김창집이 유배를 가게 되고 이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바로 그 유배지가 우리고향 성주란 것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스승 김창집을 잃은 정선이, 스승이 죽음을 맞았던 성주고을에서 비통한 마음을 달래며 붓을 잡게 된 것이 쌍도정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 더욱 정성을 기울여 그렸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1725년 노론이 복권을 한 후 20여년이 지나서 김창집을 기리는 충헌각(忠獻閣)이 쌍도정 가까운 조그마한 동산 기슭에 세워졌었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우리 어릴 적, 음산하기만 했던 그 비각 앞을 지날 때는 무서운 마음이 들어 뒤돌아 보지도 못하고 뛰어 달렸던 생각이 난다. 무서웠던 충헌각도 불행하게 한국동란 때 전화를 입어 없어져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1993년, 김창집 선생을 따르던, 당시 문중의 후예들이 뜻을 모아 `충헌공 몽와 유허 비각 복원사업회`를 결성해서 이하영 회장이 중심이 되어 충헌각을 복원했다.
지금 청사기념관을 이웃으로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으면서 복원된 쌍도정과 함께 새롭게 조성한 우리고향 성주의 역사테마공원을 더욱 뜻깊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