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님이 돌아가셨다. 누구나 나고 살고,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사라 하지만 남다른 형제지의가 허물어지려 함에 에는 가슴 가눌 길이 없다.   우리는 예로부터 지켜 내린 이른바 네 가지 예(禮)인 관혼상제가 있다. 그 중에 상례는 그 예에 따라 장례를 치러야 하니 어쩌면 우리 사는 세상에서 제일 큰 문제이기도 했다. 그만큼 상사에는 차려야 할 격식이 많아 오늘의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형님의 상을 맞아 너무 간결한 상례를 치르고 보니 텅 빈 가슴이 너무 허허롭다.   산업화 이전에는 장례는 3년상이 통례였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명문거족은 3년상을 엄수하고, 그것도 효심이 깊으면 산소 옆 여막(廬幕)을 짓고 아침저녁 상식에는 호곡하며 3년상을 치루는 명가도, 효도가문도 있다. 또 중·상류층도 1년상은 치뤘으며 그도 안 되면 100일상, 49제, 더 간결하게는 삼우제로 탈상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짧은 상례는 화장해서 봉분도 없이 골호(骨壺·재 단지)를 묻고 그 앞에 표지석을 세우면 그것으로 끝나고 심지어 초·재·삼우제도 생략하고 바로 탈상도 한다.   사실 형님도 집에서 간략하게 제상에 모셨다가 49제로 탈상을 하기로 했으니 역시 변화하는 세태는 거스를 수는 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병원 장례장에서나 장지에서도 상주는 호곡도 없이 절만 하고 모든 순서를 장례업체가 주도, 대행했다. 수백 년을 지켜 내리던 전래의 상례는 찾을 길이 없다. 이는 화장장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화장이 끝난 후 유골을 상주에 보이며 혹시 이물질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했다. 이를 보는 순간 기가 차 운명했을 때보다 더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다. 너무 급작한 일에 믿기도 어려웠지만 이젠 돌아가셨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위중하단 소식 듣고 달려가 가볍게 의사소통도 했는데, 그때가 바로 엊그제인데 이게 웬 말이냐. 한줌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사라는, 문사들이 흔히 쓰는 `낭만적···`의 그 수사가 몹시도 거슬렸다. 80여 년을 서리서리 걸어왔는데 그게 너무 허망하니 이를 수유(須臾) 인생이라 하는 건가? 너무 허황함에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미수(米壽)까지 향유했는데 이리도 허무하고 남은 것이 유골 여남은 점뿐이라는 말인가. `한 점 부토`를 넘어 이게 남가일몽이란 말인가. 이는 초부(樵夫)도, 공경대부(公卿大夫)도 다름이 없더란 말인가? 아, 슬프도다!   한참 전 `이별 연습`이라는 연극 공연이 있었다. 그 얘긴즉 그 주연배우가 위암 3기 판정(실제 얘기)을 받고 언젠간 자식들과 이별할 테니 그 이별 전에 미리 좀 아픔을 즐거움으로 바꾸자는 테마였다. 이를 본 후 어느 날 지나가다 형님 집 앞을 거치게 됐는데, 마침 형님은 캐나다 딸집에 여행 중이어서 그냥 돌아섰지만 내 형님도 언젠간 이별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했던 일도 있다. 그런 형님과 훗날도 아니고 바로 지금 영원한 이별을 맞자니 슬픔은 더욱 가슴을 짓눌렀다.   내 형님! 일본서 보통학교 다니다 광복 직후 관부연락선을 타고 귀국했다. 초교 5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이다. 그래도 지역 마을금고 이사까지 역임했다. 또 그때 초등학교 교사가 부족하여 사범학교 속성과가 있었는데 거기 가고 싶었지만 생업(농사일)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고, 우연한 기회에 토로한 적이 있다. 그게 전부인 과묵한 내 형님의 성품이다. 내 10대 시절 그땐 형으로부터 꾸지람도 듣고 심하게는 매도 맞을 때였는데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는 내 형님이었다.   장례업체는 장례는 당일로 끝내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건 상가의 사정에 따라 할 일이며 거기까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하고 장례는 종료했다.   세상 참 많이도 변해 상전벽해가 무색하게 되었다. 3년상은커녕 1년상도 아니고 웬만한 집도 100일 탈상이 대세인 듯하다. 그나마도 장례를 끝내려면 지내는 제사만 해도 산소 들이고 돌아와 지내는 반혼제(返魂祭) 등 네 차례의 제사가 있지만 그걸 다 생략해 버렸다. 내 형님도 그 대세에 따라야 한다니 뭔가 맘이 헛헛함을 금할 길이 없다.   누가 강하게 말했다. 성리학(주자학)이 사회의 주조(主潮)일 때는 이른바 주자가례의 관혼상제에 따르는 것이 철칙이었기 때문에 거기 너무 함몰하다 보니 신문물의 근대화도 늦어져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도 겪었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한다.   오늘의 이 시대, 모두의 중론이 `AI시대`가 먼저 나오는 이 시대에 전래의 관혼상제는 성균관 유도회나 명문대가에서 이어갈 조상의 문화유산이라고만 해야 하게 되었다. 나 같은 `라때`도 이제는 그에 대한 말 한 마디도 할 수 없으니 그게 이 세태를 따르는 일임에 분명하다. 나도 변해야겠다.   형님! 100세시대에 미수이면 결코 장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 병고는 아니어서 고종명(考終命)은 했다고 감히 이 동생 마지막 말씀 올리게 됨을 용서하옵소서. 간난신고(艱難辛苦)도 다 털어버리고 천상에서 부디 영면하소서. 이 소제는 기원하옵니다.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6: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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