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타계한 소설가 최인호 작가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면서도 불교에 심취하여 고승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소설 `길 없는 길`을 발표해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한동안 언론에서 많이 다루어지기도 하고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나도 그 소설을 읽으면서 그분의 섬세하고 화려한 문체에 탄복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자들의 치열한 삶을 표현한 작품에 눈을 떼지 못하였다.
마지막장까지 열심히 책장을 넘기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불교에 대한 시선도 엿보면서 깊은 감동에 빠지기도 하였다. 소설이 거의 완성단계에 왔을 때까지 제목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중 잠간 눈을 부치고 누웠다가 비몽사몽간에 떠오른 단어가 `길 없는 길`이었다는 일화도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우리인생의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을 것이다. 고속도로처럼 잘 다듬어진 탄탄대로도 있을 것이고 좁고 험한 고갯길도 무수히 많을 것이며 가시덩굴로 가로막힌 돌짝길도 마주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리라.
아침에 일어나서 집을 나섰다가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평생 수없이 많은 길을 걷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잘 아는 대중가요 가사에서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고 묻는 구절이 있다. 삶이란 나그네처럼 왔다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 길을 걷느냐에 따라서 각자의 운명은 달라지는 것이리라.
누군가 앞서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이도 있을 것이고 길이 없어도 남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만들어서 인생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선구자로 부르면서 존경을 한다. 한자로 길 도(道)자는 이치와 도리,(道也者 不可須臾離也) 근본, 근원, 우주의 본체(道也者 萬物之始)를 나타내는 뜻으로도 쓰이며 수행자가 마지막 깨달음을 얻는 것을 득도(得道)즉, (道)를 이루었다고 하고 특정 분야에서 어느 경지에 이른 상태를 도(道)가 통했다고 하기도 한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덮인 들판을 걸어 갈 때는 不須湖亂行(불수호란행) 행여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게 가지마라 今日我行蹟(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걸어가는 이 발자취는 燧作後人程(수작후인정) 반드시 후인들의 길잡이가 되리니.
이 시는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 후 남북협상 때 인용해서 잘 알려진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다. 몇 백 년이 지났지만 부끄러운 길을 가지 않겠다는 대선사의 깊은 뜻이 담긴 이 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글귀가 아닌가 생각된다.
몇 년 전 우리 동네에는 새 공원이 생겼다. 수인선 전철공사를 하면서 나무도 심고 운동기구도 설치하고 무엇보다 `황토십리길`이라고 이름 지어진 산책길을 잘 만들어서 걷기운동하기에 아주 좋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번듯하게 잘 만들어놓은 길 외에도 샛길이 여기저기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먼저 가로질러서 가게 되고 다른 사람도 따라 걷다보니 새로운 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사람들이 처음 만들어진 길보다 샛길로 더 많이 다니게 되었다.
나는 하루에 만보걷기를 하는데 공원길을 걷다보면 처음부터 잘 닦여진 길보다 새로 생긴 좁고 구불구불 못생긴 길을 걸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낀다.
샛길이 만들어 진 것도 의도하고 계획이 서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냥 사람들의 마음이 가는대로 발걸음이 옮겨 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없던 길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세상 이치이고 순리가 아닐까싶다. 아하! 길은 이렇게 만들어 지는구나.
사람들은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최단거리의 동선을 찾는다고 한다. 설계한 사람들의 의도와 다르게 만들어진 동선을 희망선(希望線, deser path)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등산로라고 한다.
처음에는 작은 동물들이 다니던 길이 큰 동물들이 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지름길을 사람들도 따라서 다니게 되는 것이다. 길 없는 길에 길을 만들어라. 무심결에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