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문화예술회관에서「2006년 2월의 독립운동가 한계 이승희 선열 공훈선양학술강연회」가 개최됐다.
이날 남기형 순국선열유족회 상임부회장의 사회로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가 선정 기념패와 3·1운동기념사업회에서 영구보존용 태극기의 증정으로 식이 시작됐다.
또 이창우 군수, 조상용 군의장, 조용택 교육장을 비롯한 지역기관장과 이규석 유족대표, 최용수 대구지방보훈청장, 권준호 광복회 대구경북연합회 지부장, 이홍종 순국선열우족회장, 마한산 3·1운동기념사업회 수석부회장 등 생존애국지사와 지역주민등 3백50명이 참석했다.
이창우 군수는『한계 이승희 선열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매우 의미 있는 행사를 갖게되어 영광이다』며『선생의 독립정신과 열정은 지역발전에 헌신하라는 뜻으로 알고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또 권준호 지부장은『선생의 정신을 이어 받아 정직하고 남을 존중하며 나라사랑과 희생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2부에는 권대웅 대경대학교 교수의「한계 이승희 선열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주제로한 강의와 대한독립군가선양회 합창단의 추모합창이 이어졌다.
한편 이승희 선열은 1847년 2월 19일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아들로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본명은 계도(啓道)라 하였으며, 호는 강재(剛齋)·대계(大溪)·한계(韓溪)라 한다.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유림 3백여명의 서명을 받아 을사오적의 참형과 조약을 파기하라는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상소하여 대구감옥에서 투옥됐다.
이어 국채보상운동에 가담해 서상돈(徐相敦) 선생과 모금운동을 벌이다 친일파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했으며 고종의 양위사건이 발생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이상설(李相卨)등과 함께 동포자제들의 교육과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이어 1913년 베이징을 방문, 각지를 순방하며 중국 명사들을 만나 한국의 자주독립을 역설하다가 1916년 뜻을 다 이루지 못한 채 70세로 순국했으며, 유고로는 「한계유고(韓溪遺稿)」가 있으며, 1963년 대통령 표창·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이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