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필동 형님께서 별세(別世)하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으로 한동안 큰 슬픔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5형제 중 위로 형님 세 분은 차례로 이미 우리 곁을 떠나셨고, 이제 한 분 형님마저 떠나시니 이제 나 혼자 남았다는 게 참으로 슬프고 애통한 마음 가눌 길 없다.
아직은 떠나실 때가 아닌데 달포 전 낙상 후유증을 끝내 버티지 못하신 것이 남은 가족들에게 더욱 가슴을 치게 한다. 애별리고(愛別離苦)라고 했던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거스를 수는 없지만, 일생동안 편안하게 살다가 천수를 다 한다는 고종명(考終命)이 그렇게도 어렵더란 말인가.
더구나 형님께서 노후는 병마와 싸운 세월이 너무도 길었다. 30여 년 전에 악질(惡疾)인 허리디스크 수술 후 그 후유증으로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봐 왔다. 어디 그 뿐인가. 직장암이 발병하여 세 차례의 수술을 하셨고, 담석증으로 쓸개 제거 수술, 지하철 계단에서 낙상해 머리 시술, 심장 스탠드 시술 등 국내 최고의 S병원을 내집삼아 드나드신 이력이 참으로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제 형님네 아이들이 모두 효성이 지극한 효녀들이고 노후가 좀 편안하시길 바랐는데 반평생을 병마와 싸우신 게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나는 형님과 네 살 차이로 평생을 함께하면서 가장 가깝기도 했지만 가장 많이 부딪치면서 지내왔고 어린 시절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아시는 사이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 두 형제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제가 돌을 지난 18개월 무렵 겨울철 방안에 피워둔 화로를 깔고 앉아 엉덩이에 크게 회상을 입어 고생하는 모습을 어린 형님께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내가 다섯 살 무렵 병명을 알 수 없이 몹시 앓은 적이 있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로 가족 모두가 소생하기가 어렵겠다고 절망적인 그 순간도 형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모두 지켜봤다고 했다.
철이 들고 커 가면서 형님 겸 친구처럼 응석도 부렸고, 때때로 내가 버릇없이 형님의 심기를 거스른 기억도 부지기수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형님이 떠나신 이제야 사죄를 드리게 되었음을 자책한다.
제가 기억하는 형님의 어린 시절은 저와는 많이 다르게 꿈이 많으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형님은 항시 책을 가까이 하시는 모습을 똑똑히 봐 왔다. 심지어는 소 죽을 끓이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당시 지식층에서 읽힌다는 `사상계` 라는 월간도서를 늘 옆에 끼고 읽고 또 읽으시는 모습을 봤다. 아마도 장래 꿈이 문학가가 아니었나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당시는 전기불은 고사하고 촛불도 아닌 석유 호롱불을 밝히던 시절이었다. 형님이 책을 읽으신다고 밤늦도록 호롱불을 밝히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매우 못마땅해 하셨다. 절약정신이 몸에 배셔서 석유 한 방울이라도 아끼고 잠자리에 들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저녁만 되면 `필동아 불 꺼라`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랐다.
그렇게 숨은 노력의 대가가 형님은 훗날 수필가로 등단하여 그 어렵다는 J일보 독자란 기고부터 지역신문에 자주 글을 실어 독자들에게 필력을 확인 받았다. 제가 아는 지인들 중에는 형님의 필력을 극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만 보더라도 그 많은 노력의 결실이 아닌가 한다.
혹자는 `필동씨가 대학이라도 나왔더라면 지금쯤 문단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형님은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를 건너뛰어 농업고등학교를 입학했지만 그 마저도 1학년 중퇴가 학력의 모두이다. 결과적으로 초등학교 졸업장이 최종학력이지만 독서를 통해서 또 남모르게 피나는 노력의 결실은 몇 권의 저서를 남긴 것이 이를 반증한다. 특히 조상(祖上)에 대한 관심이 커서 수많은 서적을 뒤지고 발굴하여 선조들의 이력을 몇 권의 책으로 펴냈다. `祖上 모르고 산 光陰 六百年` `나는 祖上도 모르고 살았다`를 펴냈고, 자전적 수필집 `어릿광대의 길` `대망(大望)이 대망이 되다`와 `나는 祖上도 모르고 살았다` 증보판을 내는 등 나름 습득한 지식을 적극 활용했다. 우리 영천최씨 문중사에도 큰 관심을 가져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선조들을 언론을 통해 부각시키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형님께서는 정치 1번지라는 서울 종로구가 공모한 종로구민의 노래 작사부문에 당선되어 `가고파`의 작곡자인 고명하신 김동진 선생이 곡을 붙여 `최필동 작사 김동진 작곡`의 종로구민의 노래가 지금까지 종로구의 각종 행사에서 제창되고 있다.
형님께서는 작곡 작사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어서 `그대 생각` 등 몇 편을 작사 작곡 했지만 음악계에 연줄이 닿지 않아 사장하고 있음이 애석하다.
형님의 프로필을 보면, 2010년 서울 종로구 하나로 갤러리 부채전시회 초대작가, 한국신문예문학회 `오늘의 문학상` 수상, 한국신문예문학회 수필가 등단, 한국신문예문학회 회원, 영천최씨 서울종친회 회장(현)으로 활동했다.
흔히 하는 얘기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얘기가 생각난다. 필동 형님이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우리 아버지의 교육관은 사람이 태어나서 제 이름자만 쓸 줄 알면 되고 농사에 일손을 보태면 `등 따시고 배부르다`고 항시 강조하셨다. 언감생심 책 한 권 사줄 환경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도 본인의 부단한 노력으로 일궈낸 성과이기에 형님을 더욱 그리워하며 존경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반평생을 병마로 시달렸으니 이제는 아픔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영면하시기를 하나뿐인 동생이 두 손 모아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