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것들은 지나가고
모든 것들은 머물다 간다
비 자나가고 나면
비 지나간 자리는 젖고
비 지나간 자리는
볕만이 와서 말리고 간다
이럴 때는, 별이 지나가고
볕이 머물다 간 것이 된다.
사람의 흉중으로도 때론 비 지나가고
그 자리 위로, 볕이 머물다 가기도 한다.
2
비 지나가고, 볕이 와서 머물다 갔더라도
마음이 지닌 것 중에 못 말리는 것이 하나 있다
비 지나가고, 제아무리 볕이 와서 머물다 갔더라도
먼 곳을 향해 젖어 있는 눈시울 같은 기억이 있다.
- 시집 『구석』(실천문학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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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가 지나간 자리는 흔적을 남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조차도 잎사귀를 흔들고 먼지를 일으킴으로써 그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모든 것을 젖게 하는 비도 그렇고, 젖은 것을 말리며 지나가는 볕도 그러하다. 사람의 마음속에도 비처럼 지나가면서 젖게 만드는 것이 있고, 역시 지나가면서 이미 젖어 있는 것을 말리는 볕(세월) 같은 것도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먼 곳을 향해 젖어 있는 눈시울’ 같은 것이 있어서 아무리 볕이 좋은 날 말리려고 해도 마르지 않는 것은 있는 법이다. 잊혀지지 않는 따뜻한 삶의 기억......그것은 늘 촉촉이 젖어 있어서 우리를 일깨우고 아프게 하고, 우리가 흐린 세상의 물속에서도 썩지 않고 나날을 살아내게 하는 방부제와 같은 힘이기도 하다.
- 배창환(시인 · 성주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