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오늘은 일요일이다. 하늘은 흐려 있고 약간의 비가 내리면서 동이 텄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신설동 집을 나와 동대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거리는 평상시나 다름없이 평온한 아침이었다. 깨끗이 차려 입고 교회로 가는 사람, 등산복 차림으로 등산 길에 나선 사람, 휴가ㆍ외박을 나와 마냥 즐거워하는 군인들, 서울운동장에서 열리는 무슨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드는 학생들 등으로 흥청거리는 물결에 모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동대문 가까이 갔을 때 돌연 군용 쓰리쿼터가 스피커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외출 중인 국군 장병은 즉시 소속 부대로 귀대하라!” 헌병들이 거리 군데군데 배치되어 지나가는 군인들에게 부대로 빨리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또 38선에서 무슨 분쟁이 생겼나 보다’라고 그저 가볍게 생각했다.
예배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가운데 끝났다. 그러나 예배가 끝난 후에는 모두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교회에서 거리로 다시 나왔을 때 무장 군인들을 가득 실은 군용 트럭이 대전차포를 뒤에 달고 청량리 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거리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경향신문의 호외가 거리에 뿌려졌다.
“괴뢰군이 오늘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서 남침을 시작했다. 아군은 즉시 적과 교전하여 이를 격퇴 중에 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서 주인집 할머니가 틀어 놓고 있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정부가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적의 침략에 대해 적극 대응할 것을 발표하고 있었다. 마음이 몹시 긴장되었으나 정부가 항상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즉시 진격해서 ‘아침은 해 주에서 먹고 저녁은 평양에서 먹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단시일 내에 북한 전역의 실지를 회복하여 남북을 통일한다고 하는 말을 믿고 싶었다. 전에도 옹진이나 개성에서 38선 분쟁이 있었으나 아군이 승리했던 것을 생각하며 크게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시민들은 트럭과 징발된 버스로 계속 북상하고 있는 육군부대들을 환송하며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라디오는 계속해서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북괴군은 옹진ㆍ개성ㆍ동두천ㆍ포천ㆍ춘천ㆍ강릉 등 각 지역에서 일제히 남침을 개시했다. 아군은 이것을 도처에서 저지하면서 적절한 작전을 전개 중에 있다. 동두천 정면에서는 적이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지만 아군은 이것을 격퇴시켰다” “옹진 지구에서는 적 전차 7대를 격파하였고 따발총 72정, 소총 132정, 기관총 5정, 대포 2문을 노획했으며 1개 대대를 완전 섬멸했다” “삼척 지구로 상륙한 공비 부대장은 부대와 함께 귀순했다.
또 서해 해상에서는 괴뢰군을 만재한 대형 선박 1척을 격침시켰다” 아침의 서울은 평화롭게 밝았지만 낮에는 불안에 쌓였고, 저녁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변해 갔지만 밤이 되자 정부와 각 군 본부의 전과 발표로 마음을 놓고 또다시 평화로운 서울로 돌아간 듯했다. 모든 염려는 주님께 맡기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1950년 6월 26일
날이 새기 전부터 북쪽에서 포성이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계속 북상하고 있는 완전무장한 부대들을 환송했다. 아침에 주한 미국대사 무쵸는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한국군의 용맹성을 칭찬하면서 “한국은 방위될 것이다. 단결하여 각자의 임무를 다할 것을 당부한다”라고 국민을 고무했다. 한편 군 보도기관은 다음과 같은 전과를 발표했다. “옹진의 17연대는 해주시를 점령했다(그러나 사실 이때 17연대는 인천으로 철수하여 상륙 중에 있었다). 또한 국군의 일부는 38선에서 20km까지 북상했다” 이러한 시원스러운 보도를 듣고는 학교에 갔다. 수업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첫 시간이 영어회화 강의였는데 거리에서 목격한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하느라 교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더니, 교수가 “Are you an onlooker?”(구경하러 왔니?)라고 핀잔을 주었다. 학생들이 까르르 웃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강의실 밖으로 나와 버렸다. 바로 그때 붉은 표지가 붙은 낯선 비행기가 학교 상공을 저공비행으로 지나가면서 전단을 뿌렸다. “악질 반역자 리승만의 명령으로 국방군이 침략해 왔기 때문에 인민군대는 자위의 목적으로 이를 격퇴시키고 정당한 공격을 개시했다.
리승만 일당은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곧바로 자취방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보니까 동대문 조흥은행 앞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예금을 찾으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나도 서둘러 예금통장을 가지고 은행으로 달려갔다.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차례가 되어 예금을 몽땅 찾았다. 예금을 인출할 사람들은 여전히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데, 내가 은행에서 나오자마자 오후 3시도 되기 전에 은행은 셔터를 내리고 말았다. 군 보도기관에서 승전의 뉴스를 보도하고 있는 사이에 의정부 방면에서는 피란민들이 서울로 밀려들고, 적이 의정부에 진입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인지 포성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며 어젯밤과 똑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1950년 6월 27일
아침에 깨자마자 주인집 할머니 방으로 가서 라디오를 들었다. 지금까지의 승리에 대한 뉴스와는 딴판인 중대 발표를 했다. 적이 서울 근교에 침입했기 때문에 정부와 국회는 임시로 수원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거리로 달려나가 보았다. 의정부 방면에서 왔다는 피란민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소ㆍ달구지ㆍ손수레에, 등에, 머리에 짐을 잔뜩 싣고 지고 이고, 꾸역꾸역 동대문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전선에서 후송되는 부상병들도 보였다.
그들은 전차! 전차! 전차 때문에 할 수 없이 밀려 내려온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나는 정신없이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짐을 꾸렸다. 꾸려 놓고 보니 모두가 책뿐이었다. 피란을 가면서 책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런 것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책이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작정 챙겼던 것이었다. 허둥지둥 동대문까지 가서 보니 나처럼 무턱대고 집을 나온 사람들이 우글우글 끓고 있었다.
등산복 차림에 륙색을 멘 사람, 캔버스만 달랑 메고 다니는 화가, 바이올린만 들고 나온 여학생, 자전거를 끌고 나온 사람, 머리에 이고, 어깨에 메고, 아이의 손을 잡고, 소리를 지르고, 한강 쪽을 향해 가는 사람, 도리어 북쪽을 향해 발길을 옮기는 사람, 모두가 제정신을 잃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엉겁결에 집을 나왔다가 “서울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한 피란이다”라고 하며 집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다시 책 보따리를 메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같은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배진호군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인지 그냥 꼼짝도 하지 않고 방에 누워만 있었다. 라디오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다시 서울로 환도했으며 결코 서울을 포기하지 않겠으니 국민은 안심하고, 서울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도 대포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들려 오고 있었다.
1950년 6월 28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전차를 선두로 인민군이 동대문 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인민군 진주를 환영하는 만세 소리가 들려 왔다. 한 방에서 지내는 배진호군이 우리도 나가서 환영하는 군중에 합류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경거망동하지 말고 냉정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하며 그를 말렸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좀 두고 보자고 하면서 하루 종일 자취방에서 보냈다. (‘소경의 손을 붙잡고’ - 혼돈의 시간 - 중에서)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