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문예 문학회 회원들이 한번 쯤 만났으면 하는 전갈이 왔다. 평일에는 어린이 안정지킴이로서 한국고령사회 비전연합회의 일이 너무 밀려 시간을 낼 수가 없다.
모처럼 틈을 내어 잡지사에 나가니 이석곡 소설가, 서진송 시인, 양경분 시인 그리고 수필가 도창회 선생이 나와 있었다. 연휴라 음식점의 대부분이 문을 닫고 있어 겨우 문을 연 일식집을 찾아 그 곳에서 잡지발행인과 편집장과 함께 어울려 반주를 하면서 오찬을 나눌 수 있었다.
과거의 문인들은 술을 마시며 낭만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인들은 대부분이 절주를 하며 건강을 우려하는 생활인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의 모임은 신문예 문학회 회장직을 한 번 더 맡아 달라는 모임이었다.
나로서는 더 이상 못한다고 사양했지만 술잔이 몇 순배 돌면서 얼떨결에 만장일치로 회장직에 추대되고 말았다. 나는 벌레 씹은 기분이 되어 회원들이 발간한 시집 20여권을 선물로 받아 봉투에 넣어 들고 전철을 탔다.
지하철 안은 손님도 별로 없이 무척 한가했다. 선반에 시집 꾸러미를 올려놓고 앉으니 반주가 과한 탓인지 취기가 돈다. 비몽사몽에 친구들과 만날 약속 장소인 마두역에 당도하여 급하게 뛰어내렸다.
그 순간 “앗차” 선반에 올려놓은 시집을 두고 내린 것이다. 급히 다시 타려했으나 지하철 문이 닫히고 지하철은 출발 신호를 남긴 채 떠나고 말았다. “어떻게 한담?” 야속하게 떠난 지하철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조금 늦어진다고 양해를 구하고 다음 열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일각이 여삼추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화장 짙은 여인이 가져갔다면 찾을 수 있을까? 그녀가 그냥 둔다 하더라도 또 다른 역에서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가 있잖을까.
눈 감으면 코도 베어가는 세상이라는데 불길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정말 탐욕으로 가득찬 요지경 세상이라는데, 맹자는 아무리 선한 마음도 순간적인 물욕으로 인해 흐려진다고 했는데 온갖 불길한 잡념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인간에게는 좋은 물건을 보면 누구나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고 했다. 욕심은 인간의 본성이 사물을 접하면서 드러나는 자연적인 칠정(七情:喜怒哀樂愛惡欲) 가운데 하나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했다. 더구나 열차 선반에 물건이 있으니 견물생심이 동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동시에 이성을 갖고 있어서 아무리 욕심이 나더라도 자신의 물건이 아니거나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물건이면 더 이상 탐내지 않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오늘 내가 놓고 내린 시집도 인간의 성선설이 통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 순간 지하철이 당도했다. 내가 내렸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선반을 올려봤다. 그 자리에 시집봉투가 그대로 남겨져 있으면 하는 바람이 내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든다.
“남의 가치 있는 물건을 빼앗을 목적으로 사기를 치는 게 다반사인 요즈음 선반 위에 팽개쳐진 시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라고…” 종착역까지 가는 전철이 느리기만 했다. 가까스로 종착역에 도착하자마자 뛰어서 매표창구로 달려가서
“바로 앞 차에서 물건을 놓고 내렸는데 찾을 수 있을까요?”
“놓고 내린 물건이 무엇인가요?”
“시집 2-30권이 됩니다. 노란 대 봉투 두 곳에 분리하여 넣어 두었습니다”
창구에 앉아 있던 여직원은 친절하게도 지나온 역마다 전화를 하여 확인한 후 각 역에는 신고된 물건이 없다고 하면서 종착역 역무실에도 확인하면서 결국 분실된 물건이 신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의 실망은 대단했다. 창구에 우두커니 서있으니 나의 몰골이 가여웠던지 물건을 찾는 대로 연락할 수 있는 연락처를 남겨두라는 것이다.
나는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어주고는 실의에 빠진 채 전차에 몸을 실었다. 혹시나 하고 기대한 것이 바보처럼 느껴지는 데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선생님, 잃어버린 물건 찾았습니다. 역무실로 와서 찾아 가세요”
나는 그 순간 귀를 의심하면서 바로 찾아가겠다고 되뇌며 역방향의 전차를 바꾸어 탔다. 뭇사람들이 세상이 썩었다고 되뇌더라도 그렇지 않다는 소중한 경험을 한 것이다.
역무실로 찾아가니 시집봉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얼마나 반가운지 직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직원들과 커피라도 한잔 마시라고 촌지를 전달하려하니 직원들은 끝내 사양하면서 나의 성의만 받아두겠다는 것이다.
정말 공직자의 자세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연일 공직사회가 부패했다고 떠들고 있지만 대다수의 공직자는 이렇게 청렴하게 건재하고 않지 않은가. 이들이 있어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창구로 뛰어가 그 여직원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신바람나게 전철을 탔다.
이만하면 살맛나는 세상이라고 쾌재를 부르고 싶을 뿐이다.
누구나 즐거움으로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요지경 같은 세상이 요원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친구들과의 약속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