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절망의 끝에서 생기게 된다. 5월 산야의 연초록 잎새는 꽃보다 더 아름답다. 짙푸른 보리밭 둔덕을 바라보고 있으면 온 누리가 풍요롭고 신선해 보이나 아련한 보릿고개를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가난에 시달리고 고난에 시달리던 그 어둠의 터널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이 푸른 보리 이삭의 의미를 어떻게 알며 배고픔의 슬픔을 어찌 측량이나 할 수 있을까? 경제가 바닥이고 기업의 부도 사태로 온 나라가 연일 시끌시끌하다. 조금 덜 먹고 덜 입더라도 인정이 고향 같은 마을, 생의 향기가 있는 삶의 터전을 소망하는 것이 우리의 정서인데도 세상의 인심은 갈대와 같이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침을 뱉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IMF의 찬바람은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에서 부는 바람도 아니요, 호숫가의 잔 물결을 일으키는 실바람도 아니다. 중진국에도 한이 차지 않아 선진국 문턱이라고 자부하고 제법 우쭐대던 ‘대강주의, 적당주의’가 마침내 양풍(洋風)의 ‘합리주의, 원칙주의’에 혼쭐나고 있는 것이 IMF 한파가 아닌가? 작은 벌레도 바람의 언어를 읽는 더듬이를 갖고 노래할 때와 일할 때의 경계를 분간할 줄 아는데, 빚더미의 나라 경제를 가지고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라고 허세를 부리며 OECD에 가입하고 UN 안보리 이사국에 선임되어 헛기침을 했다. 실리보다는 남의 눈에 보이기 위한 허세였다. 민주화를 위한 떼거리와 단식은 있었으되 진정 이 나라의 선지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외국의 경제학자는 우리의 경제를 음주 운전에 비유하여 빈정댔다지만 물 마시고 치간(齒間) 후비며, 헛배 두드리는 체면 문화는 이제 지워야 할 때이다. 우리의 지붕 위를 불고 있는 이 바람의 의미를 모르면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가 매우 힘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보화 시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인류 문명을 거시적으로 볼 때 거창할 것 같지만 농경 산업 시대에서 다시 수렵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수렵 시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사냥 시대이다. 짐승을 잡기 위해서는 공포와 불안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시대이다. 필요로 하는 사냥감은 산이나 바다 아무 곳에나 있는 것이 아니다. 짙은 숲 속에 사는 짐승도 있고, 땅속에 살기도 하고 나무 위에 있기도 하다. 산토끼가 모여 사는 곳이 있는가 하면 노루가 사는 곳이 있다. 날짐승이 사는 곳이 있고 맹수나 초식 동물이 사는 곳이 다르다. 물고기도 깊은 곳에 사는 고기가 있는가 하면 얕은 곳에 사는 고기도 있고, 맑은 물에 사는 고기가 있는가 하면 흐린 물을 좋아하는 고기도 있다. 모두가 자기의 알맞은 환경에서 조화롭게 적응하고 각각의 특성에 따라 자기에게 알맞은 집을 지어 살아가고 있다. 사냥을 하려면 이러한 동물의 특성을 잘 알고 숲 속의 지리와 물길의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좋은 사냥감을 구할 수 있다. 잘못된 정보로는 허탕을 칠 수도 있고 생명의 위험이나 모험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예측 불가한 상황도 있다. 오늘의 사냥꾼들은 활이나 창 대신 달러라는 화폐의 무기로 형형색색의 향기를 풍기며 먹이감을 찾아 요상스런 손짓으로 유혹을 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한다. 이러한 사냥꾼의 꾐에 우리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그 알량한 이익에 눈이 어두워 기술과 정보에 투자하기보다는 부동산에 투자하고 기술 제휴라는 이름 아래 사냥터를 만들어 주었다. 창조적이고 활발한 기업 활동은 죽었고 힘있는 자의 그늘에서 부실 채권이나 부도 기업을 만들고 밀실에서 경영을 하다 보니 이 모양 이 꼴로 남의 나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선량한 국민마저 까무러지게 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사냥감을 찾아 나서 보자. 적을 안다면야 너무 떨 필요도 없고 위기 실상을 겁낼 것도 없지 않은가? 숨을 곳도 보일 것이고 공격할 시점도 보이지 않는가! 모래판에 몰아넣고 들배지기로 넘길 수도 있고 태권판에 불러들여 이단 옆차기로 기절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바다를 건너고 낯선 도시를 거치며 산을 넘고 사막을 걸으며 우리의 장터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지도자, 경제 팀이 나라 살림을 잘못해서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다 해도 우리 모두의 업보가 아닌가? 누구를 원망하랴! 역사 발전의 최고 수단은 고난이라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고난의 순간을 너무 아파하지 말고 비어 있는 독에 술을 채우듯 해 보자. 부득이 남의 돈을 빌리게 됐다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자! 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게 마련이며 빌리고 빌려 주는 것이 돈이 아닌가. 안 빌리면 좋겠지만 빌려 쓴다고 하여 기죽을 필요는 없다. 기가 살아야 경제도 산다. 우리는 이보다 더 어려운 시기도 이겨내고 60불의 국민소득을 1만 불로, 서양의 2백 년 근대화 작업을 사십 년 만에 이루어, 한강의 기적이라고 세계가 찬탄하는 저력 있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우리의 소금 장수들은 구미호의 유혹에 따라 깊은 산 호롱불을 찾아 새 길을 만들어 나갔다.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다고 너무 의기소침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는 지도력을 되찾고 기업과 금융기관은 국민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면 이번 이 한파는 우리에게 유익한 기회를 제공해 준 셈이 아닌가? 고난의 역사 어둠의 한을 판소리로 새겨 이겨 나온 민족이 아닌가? 살다 보면 잘될 때도 있고 잘못될 때도 있다. 국민의 힘을 모으고 각자의 살림을 건실하게 해서 되도록이면 빠른 시일 내에 빚을 갚으면 된다. 돈은 돌고 돌며 물가는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남이 사니까 나도 사고, 남이 파니까 나도 팔면, 살 때는 비싸게 사고 팔 때는 헐하게 팔 수밖에 없다. 부지런히 일하고 돈이 생기면 저축하고 성실하게 살다가 보면 부도 쌓이고 기적도 나타나게 된다. 요행으로 부를 축적하고 한탕주의로 살다 보면 언젠가는 파산으로 가거나 철퇴를 맞는다. 물론 국가의 경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역사의 산 교훈이다. 억울한 심정, 불만스러웠던 울분도 가슴에 묻어 둔 채 외화 모으기를 시작하여 신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키고 애국 가락지 금붙이 모으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공동체가 있는 한, 우리는 절대 쓰러질 수 없다. 참으로 위대한 우리 국민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는가?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끼리 눈흘기며 욕하지 말자! 한국인은 멍석을 깔아도 신바람이 나지 않으면 춤추지 아니하고, 신바람이 나면 맨발로도 칼날 위에 서서 굿판을 만드는 민족이다. 이 고통의 한파를 우리의 선대가 하였던 보리밟기라고 생각하자. 보리밟기란 땅이 얼면서 서릿발로 공백이 생겨 떠 있는 보리의 뿌리를 살리는 작업이다. 밟아 주어야 보리의 뿌리가 착근될 뿐 아니라 포기가 분얼되고, 이삭 수가 많아져서 수확이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 작업을 하게 되면 약한 싹은 짓눌리고 찢어지며 죽기도 한다. 건강한 싹도 마찬가지로 멍이 들기도 하고 상처도 입는다. 상처받은 진주조개가 아름다운 결정을 만들어 내지 않는가? 대나무에 마디가 있으므로 곧게 자라듯 이 고난의 시대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 우리 국민이 이루어야 할 한 가지 과업이 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는 것, 21세기의 새로운 문턱에서 좌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 역사의 대전환점에서 전통의 가치관을 회복하고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다시 한 번 발현하여 슬기롭게 헤쳐 나가자. 청맥 위에 부는 바람처럼 우리 모두 새롭게 신선하게 태어나 보자.
최종편집:2025-05-13 오전 11: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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