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년 중국어 공부 후 중국 여행을 떠나다.
혼자 익힌 영어, 일본어를 현지에서 사용해보기 위해 95년에 유럽, 일본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중국에 가기 위해 3년동안 중국어를 공부해 왔다.
여행을 가기전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배워서 말을 할 수 있게 된 연후에 가는 것을 원칙으로 정해서 올해에 북경에 가기로 작정했는데 지난번과 같이 비행기표만 사서 혼자 모든걸 해결해 보려고 했으나, 7. 17. 제헌절이 포함된 비행기표를 도저히 구할 수 없어서 15일부터 18일까지 3박 4일간의 패키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인천공항에서 낮 12시 50분 출발하는 아시아나 OZ333호를 타기 위해 아침 6시에 동대구역을 출발해서 서울역에서 공항 리무진을 타고 영종도 신공항으로 가니 부자지간인 2팀, 자매지간, 우리부부, 모두 8명이 모였다.
북경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산이 전혀 없고, 끝없이 평지만 펼쳐져 있었고, 공항에 내리니 신중국 신올림픽이라는 유리에 새겨진 광고문구가 눈에 들어왔는데 이미 자기 나라가 올림픽개최지로 선정될 것을 전제하고 광고판이 만들어져 있었고, 올림픽 유치단이 귀국하는 시간이었는지 여러 사람이 환영현수막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흑룡강 출신의 조선족 여자 현지가이드를 만나서 공항을 출발해서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왔는데 날씨가 무척이나 더웠고, 노무자들이 도로가에서 웃옷을 벗은 채 힘겹게 삽질을 하고 있었는데 삽자루가 우리와 달리 일자형 나무로 되어 있어 불편해 보였다.
2. 천단공원과 서커스관람
첫 관람 장소인 천단(天壇)공원은 옛날 명·청대의 황제가 하늘에 오곡풍년을 빌었던 곳으로 기년전, 황궁우, 원구단, 제궁 등의 건축물이 남아 있고, 기년전은 층마다 지붕이 있는 3층의 원형 목조건축물로 천단공원에서 가장 아름답고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건물로 명대인 1420년에 세워져 1896년에 재건된 것으로 황제가 정월에 이곳에서 풍작을 기원한 곳이다.
양쪽에 동서배전이라는 작은 건물이 나란히 있었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동배전에는 大明之神(태양) 북두칠성, 서배전에는 夜明之神(달), 구름, 비 등의 신을 모시고 있었다.
황궁우의 남쪽으로는 원구(圓邱)가 있는데 말 그대로 둥근 언덕으로 돌로 만든 3층단이며 건물은 없다. 매년 동짓날에 제궁에서 몸을 씻은 황제가 이 원구단에 올라 그 해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을 하늘에 알린 곳이다.
그 당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중국의 황제인 천자(天子)뿐이었고, 조선이나 변방의 왕들은 천자에게 조공을 바치는 변방의 왕이지 천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구한말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우리도 원구단을 지어서 독자적으로 하늘에 제사지내면서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국가임을 표시한 것이다.
천단의 상층에도 돌로 여러개의 원형을 만들어 놓아서 제일 중심점에 황제가 밟고 엎드리는 원형돌이 있는데 워낙 사람이 많아 그 곳에서 사진을 찍지는 못하고 혼자 옛 역사를 생각하며 감회에 젖어 주위를 돌아보고 있는데 일행이 없어서 보니 벌써 멀찌감치 앞서가면서 아내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 곳에서 무거운 구형비디오를 들고 우리 일행을 촬영하는 아기씨가 있었는데 여행사와 관계없이 나온 사람인데 나중에 마음에 들면 비디오를 사면된다고 했으나 외국여행 처음 온 노인들도 아닌데 요즘 비디오를 찍어서 볼 사람이 없을 것인데 `헛고생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단공원입구에서 더워서 5원 주고 물 한통을 샀는데 약 1시간 구경후 출구에서는 깎아서 2원주고 사서 태가촌이라는 식당에 식사하러 갔다. 중국요리와 술이 나왔으나, 56되나 되는 고량주라서 먹지도 못하고, 내가 중국어를 좀 하니까 종업원들이 시중들면서 호기심을 가지고 말을 자꾸 걸면서 "중국어 실력이 매우 좋다. 언제부터 배웠느냐"고 하기에 "馬馬虎虎바(그저 그렇다)"고 하니 재미있어 했다. 종업원이 중국전통 춤을 공연하고, 피리로 아리랑을 부르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가서 춤을 한번 추려고 망설이다가 그만 두었다.
작년 11월에 대구YMCA와 구마모토YMCA와의 정책협의회차 일본 아소산 산장에 갔다가 일본측에서 바이올린으로 아리랑을 연주하니 같이 간 송영옥씨가 기꺼이 나가서 전통 춤을 멋지게 추어서 박수갈채를 받았는데, 여행왔을 때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국에서 느끼는 체면을 버리고 주위의 분위기에 맞추어 험뻑 젖어드는 것이 필요한데 아직 잘 안되는 것을 느꼈다.
식당 밖으로 나와서는 1근에 3,000원 달라는 포도를 깎아서 2근에 4,000원에 사고 일행이 사는 것을 도와주고 망과라는 과일을 처음으로 한 조각 얻어먹어 봤다.
서커스관람하는 곳으로 이동해서 보니 구청단위의 노동자 회관이었는데 300명 가량의 손님이 모두 한국인이었고, 어린아이까지 나와서 멋진 인간사슬을 만드는 등 볼만했는데 매일 공연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니 어린 배우들은 학교 갈 형편이 안되는 애들로서 서커스를 전업으로 하고 있었다. 밤 11시가 넘어 호텔로 오니 변두리 4성호텔인데, 물도 잘 안나오고, 냉장고도 작동이 잘 안되고 출입문도 잘 안닫기는 등 시설이 좋지 않았다.
3. 만리장성에 올라보지 않은 사람은 사나이가 아니다.
아침 6시에 모닝콜을 받고 6시 40분경 뷔페식당에 가서 말을 익히기 위해 일부러 현지인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다른 것은 느끼해서, 만두와 밀가루빵 그리고 죽한그릇을 먹었고, 중국인들은 계란을 4 ~ 5개씩 먹는데 소금이 아예 없고 그냥 먹었다.
중국인 모녀와 숙모 등 3명이 있었는데 내가 변호사라고 하니 한국에서 상층계급이냐고 물었고, 말이 잘 안통하고 영어로 하기도 하니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웃고 역시 외국인끼리 만남은 재미있었다.
북경을 떠나 교외로 명13능을 보러가는 도중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약국인 보생당에서 교포한의사가 나와서 붉게 달군 쇠사슬을 직접 손으로 쓰다듬는 시범을 보이고는 상처가 금방 낮게된다는 화상에 바르는 약과 생약으로 만든 파스라면서 사기를 권하기에 나는 별로였는데 아내가 화상약을 하나 샀다.
교외로 달리면서 대형음식점에 들러서 점심을 먹고 같은 건물내에 있는 대형 옥제품상가를 구경하였다. 공산주의체제에서나 가능할 정도로 수십대의 대형차량이 주차할 공간과 수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과 바로 옆에 엄청난 규모의 관광객용 상가를 지어서 외국인의 돈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가격을 비교해보니 시중가격보다 평균 7 ~ 8배는 비싸게 팔고 있었는데 국가공인상가라는 것을 내세워 정찰제로 판매하고 있었다.
명나라 3대 영락제부터 최후 숭정제까지 13명의 황제가 묻힌 곳은 풍수지리설 때문인지 모두 산을 끼도 있었고, 그 중에 만력제의 무덤인 정능을 구경했다.
지하무덤으로 가지 전 양옆에 유물전시실이 있었고, 무덤이 하나의 작은 산이었는데 입구계단으로 지하 25m정도 내려가니 천장과 폭이 각 9.5m, 길이 30m의 아치형 구조에 황제와 2명의 황후의 유해를 넣은 관이 중앙석대 위에 놓여 있었고, 그 곳을 지나면 황제와 2명의 황후용 옥좌가 놓여있었는데 사후의 세계에서도 황제로서 군림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지하의 궁전이었는데 한사람의 절대권력자를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이 고생을 했었는지 짐작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 당시 백성은 진탕고생을 했으나, 그 후손들은 그 유물로 인해 그냥 앉아서 관광객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다시 만리장성으로 가는 길은 많이도 멀었다. 케이블카로 산을 하나 넘어 장성에 도달할 수 있게끔 해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었는데 케이블카비용은 옵션이라 160위엔을 각자 지불해야 되는데 표 끊으러 간 가이드를 찾으러 갔다가 보니 1인당 요금이 40위엔인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북경에서 북쪽으로 약 70㎞지점에 높이 평균 7.8m, 폭 6.5m정도의 성벽에 북쪽을 향해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총구멍 역할과 동시에 북풍으로 성벽이 허물어지지 않게 바람통로역할도 하고 있었다.
성마루까지 혼자 올라가서 성벽에 양팔을 펼치고 사진을 찍고 나서 30위엔 달라는 티셔츠를 안산다고 하니 20위엔을 달라기에 관심없는 척하다가 2장에 20위엔 하자고 흥정을 하다 서로 웃다가 결국 30위엔에 2장을 샀다.
중국 속담에 `만리장성에 올라보지 않은 사람은 사나이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내려와서 1병에 6위엔 달라는 물을 깎아서 11병에 40위엔에 사서 기사와 비디오 찍는 아가씨 등 일행에 하나씩 선물하였다.
다시 용경협 밑에 도달하여 소위 빵차라는 총알택시를 탔는데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매우 위험하였다. 운전사가 내 목에 걸고 다니던 한국통신공사선전용 볼펜을 기념으로 달라고 하면서 한참을 졸랐으나 여행메모용이라 줄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는 서양과 달리 용을 성스러운 동물로 숭상해서 용경협 입구는 거대한 용을 만들어 그 안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서 배타는 곳까지 이동하였다. 협곡에 인공댐을 만들어 물이 고이게 되어 깊이 70m나 되는 산속의 호수를 만든 것이며, 계곡사이의 풍경이 소주항주의 축소판이었다.
아까 만리장성에 나오는 버스안에서 나이가 많은 박승평씨가 비디오 찍는 아가씨에게 우리들은 게이트볼 치는 노인도 아니고, 비디오 볼 시간도 없으니 살 사람 없다면서 아예 값을 공개하고 사진을 몇장 찍어서 사진첩을 만들어 달라고 하니 난처해하더니, 용경협에 따라와서 입장권사고 하면 적자라면서 따라오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저녁에 처음 먹어보는 `북경오리구이`는 양도 많지 않았지만 오리고기는 별다른 맛은 없었고, 그 것을 싸서 먹는 얇게 빚은 밀가루반죽이 더 맛있었다.
4. 천안문, 자금성, 이화원 관람
아침식사를 하고 호텔로비에 나오니 비디오아가씨가 사진첩 두 개에 사진 2장을 넣어 내밀기에 보고나서 내일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되돌려주었더니, 버스안에서 가이드가 비디오아가씨가 애써 찍은 사진을 한분도 사지 않겠다고 한다니 어찌된 것이냐기에 정확한 의사소통을 안해서 오해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 사진첩을 받았는데 문제는 아가씨가 수지가 맞지 않는다면서 비디오카메라는 물론이고 사진기도 안가지고 와서 천안문, 자금성에서 좋은 사진을 못찍게 되었고, 아쉽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중간에 버스에서 내리면서 좋은 여행이 되라는 인사를 받았으나 도움을 못줘서 안스러웠다.
천안문광장에 도착해보니 문화혁명직후의 주석이었던 화국봉이 2억위엔이나 되는 국비를 투자하여 지은 건물인 모택동기념당에 들어가려고 끝이 안보이는 인파가 줄서 있었다.
인민영웅기념비와 인민대회당을 지나서 TV에서 자주 본 광장북쪽에 있는 천안문에 이르렀다. 자금성의 남쪽 끝의 정문으로 명나라 영락제에 만들어졌고, 다섯 개의 문 중앙에는 모택동의 사진이 걸려 있고, 문앞에는 도랑이 있고, 5개의 돌다리가 놓여져 있으며, 좌우양쪽에 스탠드가 있어 광장에서 퍼레이드가 있을 때는 귀빈들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자금성은 동서 750m, 남북 1,000m의 장방형으로 약 72만㎡이고, 사방이 높이 약 10m의 성벽으로 둘러 쌓였으며, 그 바깥으로 폭 50m의 도랑이 지나고 있다. 건물은 외조와 내정으로 나뉘는데 외조는 황제가 정무를 보고 의식을 행한 곳이고, 내정은 황제가 일상생활을 한 곳이다.
외조는 정문인 오문으로 들어가서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등의 건물이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다. 태화전은 2층으로 높이 26.92m의 중국최대의 목조 건축물로 고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황제의 권력의 상징이다. 궁전안에는 6개의 용이 새겨지고 금박이 입혀진 기둥이 있고, 황금옥좌며, 천장장식 등은 사치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전례때는 3만㎡의 앞마당에 문무백관은 계급에 따라 각자의 위치에 줄을 서서 황제의 출현을 기다렸다. 겨울철에는 오랜 시간 서 있기 때문에 감기로 힘들어하거나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은 벌로 곤장을 맞아 죽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다. 황제가 관리와 외국사신을 접견한 장소인 건청궁을 보니 우리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에 와서 이곳에서 황제를 만난 곳이구나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깊었다.
마지막에는 황실의 정원인 석조로 된 이화원이 있었고, 옆에는 도교사원이 있었다. 고궁에서 유일하게 오래된 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그 넓은 궁성안에 남자라고는 황제한명뿐이었고, 자객의 은신처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나무 한포기 심지 않았다 생각하니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보듯이 황제는 너무나 외로운 존재였던 것이다.
자금성을 나와서 중국중의연구원 중약연구소에 들러서 강의를 듣고 침을 맞고 체질검사를 받고 나니 약을 권했다, 침을 맞고 있는데 먼저 맞은 사람들에게 약을 권하고 아내도 내 약을 사가지고 가자고 하기에 안된다고 했더니 그 말을 들었는지 앞의 두분에게 약을 권하고 나에게는 권하지 않고 아내에게 권했다.
여자가 약 사달라는 것을 안 사주면 원망이 많기에 같이 온 남편으로서는 누구도 반대할 수 가 없을 것임을 그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 10원짜리 물건도 깎자고 하다가 안사고 하면서 20 ~ 30만원하는 약은 모두 흥정도 않고 잘 사는 것이 한국사람의 특성이다.
청나라때 여름 별궁으로 사용된 이화원으로 갔다. 거대한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나온 흙으로 만수산이라는 인공산을 만들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하면서 이곳을 크게 훼손했는데 서태후가 해군의 군함건조비를 유용하여 28년만인 1888년에 재건하였다하니 중국의 재정규모를 알 수 있으나, 결국 이 때문에 군함이 줄어들어 1894년에 있은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이 되었다.
서태후가 살았던 낙수당에 서쪽으로 이어진 장랑은 길이 728m의 복도로, 계속 삼국지 등 옛고사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있으나 같은 장면이 하나도 없다 한다.
이화원에서 유람선을 타고 나와서 출구에 있는 찻집에 들르니 조선족 동포가 여러 가지 차를 설명하는데 특히 절벽 벼랑 끝에 잎이 하나만 달리는 일엽초가 있는데 사람이 못 따고 훈련시킨 원숭이가 올라가서 하나하나 딴 것이고, 단맛과 쓴맛이 모두 있어서 단맛쓴맛 다 맛보기 때문에 일명 인생차라 하기에, "아가씨 설명이 차보다 더 맛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찻잔 모양이 너무 좋아 샀는데 나중에 보니 백화점보다 훨씬 비싼 것을 알았다.
저녁에 오면서 발 마사지를 하러 갔는데 일행이 같은 방으로 들어가 안락의자에 앉아 있으면 먼저 물통을 가지고 와서 발을 씻어주고 남자 손님은 여자가 여자손님은 남자가 봉사해 주었다.
모두가 허난성에서 올라온 동향인들이었고, 특히 내 앞의 여자애가 표정이 매우 밝고 잘 웃기에 "당신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다"고 했더니 매우 기분 좋아했다. 결혼해서 남편에게 이런 마사지 해주면 사랑받는다고 했더니 자기는 그렇게 안하고 자기가 남편으로부터 마사지를 받겠다고 하며 동료들을 웃겼다.
타향에 돈 벌러온 사람들임을 알고 "가정에서는 부모를 의지하고, 나와서는 친구를 의지 해야된다"라는 중국 속담을 인용했더니 매우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나오면서 2008년 올림픽개최지 선정을 축하하고 2008년에 베이징에서 다시 보자고 하며 헤어졌다. 저녁은 현대에서 지은 호텔 건너편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한식을 먹었다. 모두들 중국에서 침 맞고, 발 마사지까지 받으니 몸과 마음이 상쾌했다.
5. 회화책에 많이 나오는 왕푸정 거리에 가다
돌아오는 날이라 9시 30분쯤에 출발했고, 여행일정에는 없었으나 시간이 좀 남아서 가이드를 설득해서 북경의 명동거리인 왕푸정 거리구경을 하러 갔는데 동안시장이란 대형백화점건물이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책과 테이프를 파는 곳에 들러서 테이프, CD를 사가지고 나와서 점심 먹으로 갔더니 만원이라 다시 맥도날드에 들렀더니 거기도 앉을 자리가 없어서 그냥 사가지고 차안에서 먹으면서 공항으로 왔는데 장거리운전이 아니라고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는 바람에 모두 더워서 혼이 났다.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밟고 탑승구 앞에 오니 책방이 하나 있기에 마음에 드는 회화책이 하나 있어서 사려니 한국 돈으로 안 받는다기에 중국돈 24위엔(한국돈 약 4,000원)하는 것을 카드결재하려니 약간 미안했다.
한국에 와보니 서울에서 폭우가 내려서 여러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난 2월에 일본 교토에 갔다온 것도 여행기 쓴다하다가 제때 안쓰니 결국 못쓰게 된 것을 깨닫고 제때 쓰기로 해서 중국갔다온지 4일만에 이렇게 여행기를 쓴다. 지난번 95년에 쓴 유럽배낭여행기는 두고두고 여러 사람에게 선물로 드리고 있다. 여행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인데 게다가 여행기를 남기면 더욱 금상첨화다.
2001. 7.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