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삼짇날 새벽 인사동에 비가 내린다. 강원도 쪽에는 대설 주의보가 내렸다지만 남녘에서는 산수유, 매화꽃이 한창이라는데 이제 곧 서울에도 목련도 피고 개나리, 진달래도 만발하리라. 9월 9일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삼월 삼짇날은 상사(上巳) 중삼(重三) 상제(上除)라고도 한다. 상사는 뱀을 본다고 해서 부쳐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3이 3번 겹친 길일로 여기며 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 불계 조에 보면 이달 상사일(삼짇날)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묵은 때와 병을 씻어 크게 깨끗하게 해서 재앙을 물리친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조상께 차례를 올리고 절을 찾아 부처님께 정성을 드리기도 하며 이날 장을 담그면 장맛이 좋다고도 한다.
일찍이 우리민족은 정월초하루, 삼월삼진, 오월단오, 유월유두, 칠월칠석, 구구절 등 같은 숫자가 겹치는 날을 기념해서 보내는 풍습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 서구에서 들어온 이상한 이름의 기념일은 잘도 챙기면서 정작 우리의 좋은 풍습은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날 호랑나비를 보면 한해 동안 좋은 일이 생기는 길한 징조로 보고 하얀 제비를 보면 그해 상을 치룰 일이 생긴다하여 좋지 않은 의미로 받아 들였다고도 한다. 또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푸른 기운으로 가득한 날에 봄나들이를 나가서 진달래꽃을 따서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둥글게 화전을 부치고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혀서 가늘게 썰고 오미자 물에 넣고 꿀과 잣을 넣어먹는 수면이라는 삼짇날 음식도 있다.
暮春風景初三日 모춘풍경초삼일
流世光陰半百年 류세광음반백년
欲作閒遊好無伴 욕작한유무호반
半江惆愴却回船 반강추창각회선
저무는 봄날 그림 같은 초사흘
빛 같이 흐른 세월 어느새 반백년
한가히 노닐래도 친구가 없어
강 중간에서 서럽게 배를 돌린다
백거이의 삼월삼짇날이라는 시다. 어쩌면 이렇게 가슴에 와 닿는지 모르겠다. 마치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나는 우산을 쓰고 비오는 인사동을 걷기 시작한다. 작업실인 건국빌딩을 출발해서 수운회관을 지나 계동 사거리를 건너서 헌법재판소를 끼고 쭉 올라가면 다시 사거리가 나오는데 계동초등학교가 있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정독도서관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인 도서관은 시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운동장 자리에는 온갖 나무들이 많이 서있고 그 밑에는 군데군데 긴 의자가 놓여 있어서 더운 여름에는 지인과 시원한 그늘에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워도 좋을 것이다.
다른 날 같으면 삼청공원까지 가서 시원한 약수도 한잔하고 말바위까지 가볍게 등산도 할 것인데 오늘은 비도 오고 마음이 바뀌어져서 덕성여중고 앞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 전에는 그저 한가한 동네였는데 지금은 이곳도 인사동 못지않게 많이 변했다. 골동품가게나 화랑들이 생기고 자연히 관광객들도 이곳까지 많이 찾게 되는 것이다. 풍문여고 앞으로 새로 난 횡단보도를 지나 인사동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때까지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자꾸만 변해가는 인사동골목이 안타깝기만 한데 그래도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서적상 간판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다. 가게들은 다 셔터가 내려져 있고 봄비를 맞으며 혼자서 걷는 인사동은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있는데 이제 날이 밝으면 이곳은 사람들로 넘쳐 날것이다. 지업사나 필방이 있던 자리에 옷가게나 화장품가게 간판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새로 짓는 건물은 어김없이 초현대식으로 바뀌다보니 이곳이 전통의 거리 인사동인지 명동길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다. 수도약국을 지나 명신당 필방, 아주화랑, 낙원떡집 분점, 형제지업사가 있는 인사동 사거리에서 오른쪽에 경미빌딩은 벌써 두 번이나 리모델링을 하면서 횟집에서 지금은 무슨 하노이의 아침이라나, 뭐라나 하는 베트남식당으로 바뀌어졌는데 그래도 내가 작업실로 쓰던 4층은 갤러리로 꾸며져 있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뒷골목으로 들어가 본다. 사대부들이 살았던 한옥들은 거의가 식당으로 변했는데 옛날 같으면 아침 짓는 연기가 집집마다 피어오를 텐데 그저 고즈넉하기만 하다. 점심시간이 되면 한 끼 배를 채우기 위해 이집 저집 손님들로 북적이겠지. 먼동이 트고 주변이 훤해지기 시작 한다. 길에는 차도 늘어나고 사람들도 많아졌다. 부지런한 주인들은 가게 문을 여느라 부산하다. 비도 그치고 하늘에는 구름도 걷히고 있다.
나는 걸음을 옮겨서 작업실로 돌아왔다. 오늘 운이 좋아서 호랑나비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들과 봄나들이를 나가서 화전이라도 부쳐 먹을까? 아직 진달래가 피지 않았으니 그것은 어렵겠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찾아 몸과 마음의 때를 씻기라도 해야겠는데 바깥 날씨가 만만치가 않으니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목욕탕에 가서 샤워나 하고 흐트러진 마음을 한번 추슬러 봐야겠다. 몇 주 전 양력 3월 3일에는 그날이 주말이어서 혼자서 신행을 했었는데 우연히도 음력 3월 3일인 오늘 삼짇날도 주말인데 새벽에 인사동 산책을 하게 되었다.
오늘 같은 날은 인사동에서 옛 풍습을 재현하는 행사를 하면 어떨까? 화전도 부치고 화면과 수면도 만들어서 나누어 먹는다면 얼마나 멋이 있을까? 외국인들에게도 좋은 관광상품이 될 것이다. 점점 잊혀져 가고 사라져 가는 미풍양속을 우리가 찾아서 살리는 운동을 서둘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