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흰 도포자락 찾아 입으시고
기침소리와 함께 재실로 나가셨던 아버지
마을 어귀에 달맞이꽃 빛나자
왕소금 찍은 돼지고기 몇 점 들고 오셨네
휘청거리는 대문소리에 놀라
앞마당 함박꽃에 앉았던 흰나비 한 마리
부랴부랴 날아가네
초저녁 남포불빛에 취한 아버지
반백의 머리칼과 도포자락을
개비듬풀마냥 저녁 풍경으로 풀어 놓으셨네
식솔들 앞에
삶은 돼지고기 몇 점 풀어 놓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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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 서민들에게 오래도록 달걀이 희망이었듯이, 돼지고기가 농민의 희망인 날들이 오
래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이 땅의 농경사회에서 돼지고기는 일년 열두 달 고기 구경을 하지 못하는 농민들에게 동물성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그래서 돼지 잡는 일은 일년에 몇 번씩 볼 수 있는 흥겨운 잔치였다. 피를 받아내고 뼈와 살을 발라낸 후, 내장 사이에 숨은 간을 들어내 둠벅둠벅 잘라서 막소금에 찍어서 삼키는 끔찍한 풍경은, 그걸 보는 어린 우리들까지 덩달아 들뜨게 만들었었다. 우리들의 속셈은 오줌보를 얻어 차는 데 있긴 했지만.
어릴 적 시인의 아버지가 재실에 가서 얻어 마신 술에 취해 돌아오면서 삶은 돼지고기를 몇 점 풀어놓으시는 장면은 우리 모두에게 퍽 낯익은 풍경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술에 취해서도 식솔들을 잊는 법이 없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아버지들의 사랑은 그렇게 돼지고기 몇 점으로도 훌륭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시다. (배창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