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는 “만남”이라는 대중 가요가 많은 인기를 누리었다. 나는 며칠 전 초등학교 동창을 삼십여 년이 넘어서 만났다. 친구는 평북 정주가 고향이다. 6·25사변이 없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친구이다. 어머니와 어린 동생 세 식구가 1·4후퇴의 피난길에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까지 왔었다. 서울이 수복된 이후에도 3년 간 같은 마을 이웃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는 서울로 나는 중학교 진학을 하느라고 고향을 떠났으니 무심한 세월 속에 삼십 년이 흘렀다. 그러나 친구와의 만남은 머리속에 숨겨졌던 추억들을 안개처럼 피어 오르게 하고 그리움으로 느끼던 우정은 시간과 세월의 흐름도 잊게 한 채 장승처럼 말문을 막기도 했다. 화려한 아름다움보다 소박하고 조그만 이름 모를 들꽃에 발길을 멈추듯 속된 삶의 현장 속에서 출세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름 밤 개똥벌레 잡아 이마에 붙이고 뛰놀던 일, 냇가에서 송사리 붕어 미꾸라지 잡느라고 하루 종일 끼니도 거르고 놀던 일, 고무신도 살 수 없어 짚으로 짚신을 삼아 신고 요즘 개도 잘 안 먹을 탈지분유 끓인 물을 얻어먹으려고 한두 시간씩 줄을 섰다가 뒷줄에 서서 모자라 얻어먹지 못하고 울던 일, 칡뿌리 캔다고 괭이 메고 하루 종일 산을 헤매던 보릿고개의 슬픈 날들을 이야기했다. 솔방울 따고 솔갈비 긁어다가 소 여물죽 끓이며 고구마 뿌리 주워 굽던 일은 가을철의 낭만이었고, 겨울철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면 양지바른 자리 먼저 차지하려고 뛰던 일, 수업 시간의 종소리도 듣지 못하고 구슬치기 말타기 땅뺏기 놀이를 하다 선생님께 야단맞던 일을 이야기했다. 자치기 제기 차기 꼰 두기 등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아직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서로가 놀라워하면서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추억들을 정감에 젖어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참 기쁘고 즐거운 만남이었다. 목월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리움의 애틋함과 만남의 기쁨이 있으므로 정의 연줄이 이어지고 삶의 맛이 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40여 년의 간절한 기구로 살아온 일천만 이산 가족의 애절하고 안쓰러운 모습을 매스컴을 통해 보도될 때마다 다 함께 공감의 눈물을 흘리고 만남의 광장을 만들어 소원을 비는 민족이다. 이래서 한국인은 정에 살고 서양인은 계약으로 산다고 했던가. 불가에서는 소매 깃을 우연히 스침도 인연에서 비롯된다는데 우리의 정서인 인연의 끈, 정은 무엇이냐? 아마 사랑의 깊은 감정이 아닐까? 성서에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 자랑 교만과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성내거나 악한 것을 행치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모든 것을 기뻐하고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바라며 견디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랑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이고 생명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문학작품 속의 사랑도 순결한 희생과 봉사로 묘사되고 있다. 어려운 고통, 찌든 생활 속의 눈물도 사랑이 있으면 수정보다 맑고 깨끗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럼 정의 샘은 어디에서 솟아나느냐? 스스로의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의 가파른 삶 속에서 세속적인 생존 경쟁에 부딪치며 사는 고달픈 생활은 대중 가요의 가사로부터 그 아픔과 상처를 위로받는다. 주고받는 정의 원리는 우리의 인체 원리와 같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신장시키고 억제시키는 신경 조절 기능의 주고받음이 있어 몸을 통제하며, 동맥피와 정맥피가 나가고 들어가는 주고받음이 있어 박동을 치며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게 한다. 태양계의 별뿐만 아니라 하늘에 떠 있는 은하계의 뭇 별들의 운행도 원심력과 구심력의 오고 감이 있음으로써 제각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섭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렇게 인간은 사랑으로 묶어 주는, 오고 가는 정이 있기에 친구가 생기고 스승과 제자가 있으며 남남이 만나 서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기르게 된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참만남과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정을 키우고 사랑을 영글게 하며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하잘것없는 재물 권력 명예의 득실에 따라 거짓 만남 거짓 사랑이 활개를 치고 있다. 위정자가 불신받은 지 오래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종교 지도자 지성인이 불신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연의 섭리와 이치는 거짓이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기 마련이다. 고구마밭에서 감자를 캘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자신을 철저히 속이면서 세상을 잘사는 사람을 본다. 문제는 사회 지도적 위치, 상위 계층의 사람들이 거짓이 더 많고 도덕적으로 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데 있다. 그래서 역사를 왜곡시키고 사회를 파행적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그 러나 그들은 진리가 아님을 그가 살아가는 동안에 반드시 자신의 모반을 통해서 체험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죽은 뒤에 가서도 기필코 후세 사람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양심을 속이면서 살아온 죄의 값이다. 진실한 만남, 즉 거짓 사랑의 탈을 과감히 벗어 버리고 어린이와 같이 순수하게 만나고 거짓 없는 다정한 만남이 있어야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살 수가 있다. 아무리 거짓이라도 사랑을 사기 치는 거짓보다 더한 죄가 있을까? 우리 모두 자신에게 장식된 여러 겹옷을 벗어 버리고 미움도 원망도 던져 버리자. 어설프게 사랑을 앞세우며 겉과 속이 다른 태도를 버려야 가슴이 통하는 사랑과 정이 움트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정녕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의(義)의 삶, 참만남과 정(情)으로 엉겨서 사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마는, 그러나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의 만남과 정이라면 진실되고 순수한 만남과 정이 참으로 그리운 세태가 아닌가? 정! 그것은 인류 최고의 과학을 초월하는 ‘생의 향기’이기 때문이다. 부끄럼 없는 만남과 정으로 살자.
최종편집:2025-05-14 오후 05:22:55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페이스북포스트인스타제보
PDF 지면보기
오늘 주간 월간
출향인소식
제호 : 성주신문주소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3길 15 사업자등록번호 : 510-81-11658 등록(발행)일자 : 2002년 1월 4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성고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45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성고e-mail : sjnews1@naver.com
Tel : 054-933-5675 팩스 : 054-933-3161
Copyright 성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