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침울 속에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시간이 지나갔다. 아직도 실종자 수색은 계속하고 있지만, 그러나 언제까지 여기 침잠해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해운업, 관광업, 요식업 등이 일시적 타격을 받다가 그 과급이 서민생활에까지 미치니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여 이제 좀 정신을 차리고 현장으로 돌아가고 있다.   국가개조라는 큰 과제 앞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중에 2기내각 청문회도 열리고 있고 재보선도 시동이 걸렸다.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지명이 되자마자, 교수시절 대학원 제자였던 현직 교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그때 제자 논문 표절에다 기고문 대필, 심지어 칼럼 대필도 했으니 제발 자퇴하라고 1인시위도 벌였다. 다소 조롱 섞인 시위였다. 장관 후보자는 당시엔 그것이 관행이었으며 제자의 앞길을 위하여 도와주려 하다 보니 지나친 면도 있었다고 자인했다.   신문방송은 연일 부정과 긍정으로 설왕설래하더니 이제는 지명철회와 자진사퇴로 정리되는 모양새다. 그러면서도 교수의 도덕적 문제를 넘어 이거야말로 `슈퍼갑`이라고 질타하기에 바쁘다. 일부에서는 대학원생들의 인생을 결정할 문제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하거나 논문 심사 때 외부 교수들의 혹평을 엄호해 주기도 한다는 긍정적인 혈실파도 있었다. 어쨌거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것이 오늘의 사제지간의 자화상이다. 특정인 몇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없는 사안이다. 그 제자, 당시엔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수행(?)했다가 자기 뜻을 이루고 나서 늦었지만 세상을 향해 `자기고백`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사제지간! 존경과 사랑이 기본 덕목인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참으로 걱정스럽기만 하다. 사제지간만이 아니다. 군신유의, 붕우유신도 있다. 삼강오륜을 들먹이자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이 혼탁한 사회, 기본 인성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순정한 인간관계도 없고, 의리도 없고 모든 활동이 상거래(?)로만 변질돼 버렸다. 최고 지성이라는 교수 사회가 이렇게 추락해도 되는가. 이런 현실에 도덕성과 윤리성만 강조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주장인가.   지식의 전수를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상거래로만 아는 이 사회, 어떻게 치유할까? 사전적 의미로는 제자를 도제(徒弟)라고도 한다. 이 도제는 스승 밑에 들어가 기술을 전수 받고 스스로 자립한다는 이른바 서구의 길드(Guild-수공업자 양성제도)를 현대의 학문과 교육에서까지 접목해서야 되겠는가. 적어도 이건 사회가 발전해 가는 모습은 아니다. 추구하는 오늘의 산업사회의 폐해에 묻혀버린 인성의 추락인가? 천박한 물신주의의 노예인가? 오죽했으면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은, 적어도 국악에서만은 도제식으로 후학을 양성해선 안 된다고 일갈을 했을까?   역사는 끝없이 변천하며 발전해 간다. 조선시대 유학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선비사회, 이때의 사제는 엄격했으며 사제동행이라 하듯 한 스승 밑에 동문수학한 제자들은 일생동안 한 스승을 섬기며 그 학덕을 존중하고 스승의 위대한 가르침에 학단을 이루기도 했다. 이런 순정한 사제의 의미가 퇴색을 넘어 추락하고 말았다고 탄식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나의 10대 선조 최죽헌(1560~1638) 선생은 우리 법산 입향조이시다. 지학지년(志學之年)일 때, 아버지 정(淨·성균진사)께서 성묘차 남행했다가 돌아가시니 경기도 원당에서 분상의 길로 이곳 법산에 당도했다. 상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어머니께서 `정한강(1543~1620)이 학문이 고명하다 하니 찾아가서 사사(師事)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이에 정 한강은 `君의 선대가 성주인이고 선영이 여기 있는데 굳이 서울을 가려 하는가?` 했다.   이래서 정한강과 최죽헌은 사제가 된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에 힘쓰고 절차탁마하는 죽헌을 보고 `덕구(德久·죽헌의 字)는 논지가 정대하여 풍의가 순후하고 덕기와 재주가 남달라 높은 도덕심과 학문의 이치를 통달했으니 자품을 높여주어야 하며 그의 독실한 행의에 다른 제자들이 덕구를 미칠 수 없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후 정한강은 유림에 큰 논의가 있으면 꼭 죽헌을 참여시키고 수하장과 함께 의논하라 했으니 한강의 죽헌에 대한 신망이 두터웠음을 짐작케 한다. 수하장이란 한강보다 대가천 물아래 산다는 뜻인데, 이 예를 갖춘 호칭으로 역시 대현(大賢)다운 풍모를 알게 한다.   선비사회에서 서원장직은 학덕의 표상이다. 최죽헌이 유림의 신임으로 중임했던 천곡서원장직을 사임코자 할 때 정한강은 `그대가 맡지 않으면 안된다`고 극구 만류했다. 한강이 돌아가신 후 회연서원 건립 때 천여 유림들은 죽헌이 한강의 수제자이니 초대 동주(洞主·원장)가 돼야 한다고 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스승과 제자! 정 한강이야말로 내 선조 죽헌과의 사제상의 표본이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오늘의 이 혼탁한 사회를 투영해 보면 더욱 분명해짐을 어찌하겠는가?   2009년 경남 창녕의 유일한 사액서원인 관산서원 사당 터에 묻혀 있던 신주를 발견했는데 영남 오현의 한 분인 정한강을 기린 서원이었다. 창녕현감을 지내셨으니 목민관 재임 시의 풍모와 공적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하게 되고 남도(기호, 영남, 호남)의 온 사림의 숭모가 어땠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6: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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