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서 1920년대 야학총서(夜學叢書)라는 활자본 서책을 소개했다.  당시는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제 치하였는데 이 서책은 뜻 있는 분이 책자를 만들어 다 꺼져가는 한민족의 얼을 일깨우고 민족정신을 고무하려는 열정이 보이는 야학용 책이었다.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문맹퇴치가 가장 화급한 일이었던 것으로 이해했으며, 비록 5천년 긴 역사에 비하면 한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이 나라가 걸어온 길의 한 부분을 알기에 충분했다.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을 간략히 싣고 훈민정음의 국역본도 있었다. 고대사를 구학이라 한다면 1920년대는 신학(新學)이라 할 수 있었으니 비록 상설(詳說)은 아니었지만 신구학을 다 가르치는 것이 큰 목적이었던 듯 싶다. 저자의 편찬 의도가 넓었음을 알게도 했지만 책 자체의 가치보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아는 데에 더 큰 뜻이 있는, 대단히 유익한 책이었다.  야학 하면 나도 생각나는 것이 있다. 20세 초반 야학당을 열어 나름으로 사회에 조그만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4·19 이후였다. 자유당 독재의 부정·불의에 항거하여 위대한 민권의 승리를 거둔 혁명이었다. 광복이 되고 왕조에서 민주공화국이 된 대한민국에 민주주의 교육이 시작됐다. 교육을 받은 대학생들이 극악했던 자유당 독재를 그냥 두지 않았다. 불의에 맞서며 상아탑에서 분연히 일어나 거리로 나왔다. 초유의 국민학생들도 자발적으로 나서고 악정에 시달린 민중들도 뒤따랐다. 성난 학생 데모대(당시는 시위 군중을 이렇게 불러다)는 급기야 `경무대로 가자!`가 되었다. 자유당 정권의 주구(走狗) 경찰은 데모대를 다만 두지 않았고 무차별 발포하기에 이 르렀다.  사상자가 속출하니 최고 지성 대학(고려대학교) 교수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기치를 앞세우고 데모대의 선봉에 서며 정부를 압박하니 드디어 대통령 하야 성명으로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위대한 민권의 승리는 그렇게 해서 마침표를 찍었다.  정의감과 의협심의 표상인 대학생들이 분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 흘려 바로 세운 나라인데 소명 의식의 발로였는지 나라 사랑의 길을 찾아 나섰다. 어느 날 지인 집에 갔더니 서울대학교 사대생 남녀 넷이 와 있었다. 피폐한 농촌의 계몽과 봉사를 위해 전국을 순회한다는 것이었다. 난 그때 나라 위하는 길이 뭣인지를 알 겨를도 없었지만 그 악명 높은 3·15 부정선거 때는 나도 젊었으니까 비분강개(?)는 했었다. 내 생애 첫 투표가 면서기 대리투표의 희생물이 됐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1박2일 동안 부녀자들에겐 건강과 위생교육을, 청소년들에겐 새시대를 맞아 개인의 진로와 나라 위하는 길이 뭣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학생들은 돌아갔고 지인은 내게 말했다. 학생들이 저러니 우리도 나라 위해 뭘 하자고 했고 내가 야학을 열자고 제안했다.  동사(洞舍·지금의 마을회관)를 야학당으로 쓰고 중학교 과정 `통신강의록`이 교재였다. 의무교육은 실시됐지만 초등학교에 한했으므로 이에도 소외된 계층(주로 부녀자)을 위한 문맹반도 부설했다.  4·19 이후의 시대상은 서두에서 말한 1920년대와 유사성이 대단히 많았다. 나라는 공화정이 됐지만 사회적 정서는 야학총서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문맹자가 있는 것이 그랬고 `국민계몽`이라는 화두가 모든 사회 문제를 포괄하고 있었다. 곧 이어 터진 5·16은 국민계몽을 넘어 더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났다. 농촌은 생활 개선을 위한 부녀회와 청년회가 결성되어 농촌부터 변혁시켜야 한다며 정부는 내거는 구호마다 근면·자조·협동이 하나의 바이블(Bible)이었으며 범국민적 과제였다. 여기 부응하여 내가 할 일은 야학밖에 없다고 하여 시작했던 것이다.  30여명 야학생들은 바쁜 농촌 생활이었지만 호연지기를 길러 준다는 의미에서 봄철 야외 교육으로 천렵(川獵)도 하고, 국민계몽을 내세워 어설프게나마 연극도 하고, 면내 체육 행사에도 참여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라도 배웠던 당시 야학생들은 그래도 딱히 야학 덕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학교의 사무직, 중견기업 사원, 개인사업 등으로 건실한 생활인이 되었 고 농토를 끝내 지켰던 일부는 영농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나마도 자그만 보람이 아닌가 한다.  지금에 비하면 그땐 정말 상상도 못할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어렵던 당시의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설명할 말은 없지만 국민소득이 60달러에도 미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을 더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도시는 공순이와 공돌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 등 당시에는 이른바 음지였지만 그것이 이나라 발전의 강고한 시금석이 됐음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역사의 한 장이었다. 이에 비하면 농촌은 내가 직접 체험했으니 그게 바로 당시의 농촌 현실이라 해도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천수답에다 가뭄이 계속되면 하늘만 쳐다봤으며 절량농가, 보릿고개가 있었고 쑥·송기(松肌)가 가난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그랬던 나라가 오늘 이만큼의 풍요를 누리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져본다. 야학에 관한 한 우리나라 농촌 계몽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경기도 안성의 최용신(1909~1935)이 있었다. 내 감히 그의 흉내도 낼 수 없었지만 열정 하나만은 있었다고 자부해 본다.  `야학총서`를 보는 순간 어쩌면 내가 겪은 젊은 날의 한때와 너무도 유사해 회상을 더듬어 본 것이다.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6:34:23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페이스북포스트인스타제보
PDF 지면보기
오늘 주간 월간
출향인소식
제호 : 성주신문주소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3길 15 사업자등록번호 : 510-81-11658 등록(발행)일자 : 2002년 1월 4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성고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45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성고e-mail : sjnews1@naver.com
Tel : 054-933-5675 팩스 : 054-933-3161
Copyright 성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