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심심해"
하윤이는 외할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같이 놀자고 메 달립니다. 하윤이는 오전 내내 동화책도 읽고 혼자 소꿉놀이를 하다 지쳤나 봅니다.
"할아버지께 놀자고 말씀드려봐."
"할아버지는 책만 읽고 계셔" 하윤이는 뾰루퉁 입이 나왔습니다.
"그래? 그럼 할머니랑 잠간 나가 놀자"
"어디 갈 건데?"
하윤이는 금방 환한 해바라기 얼굴을 하고는 외할머니가 최고라면서 작은 손바닥을 마구마구 칩니다.승용차가 출발하자 하윤이는 그만 잠이 들고 맙니다. 하윤이의 오랜 습관이랍니다. 방학만 되면 하윤이는 별 고을 외할머니 집에 내려와 며칠씩 놀다 가곤 한답니다. 할머니는 문득 잠든 하윤이의 얼굴을 보면서 어릴 때 딸을 보고 있는 착각을 느낍니다. 웃는 눈매나 평안히 잠든 얼굴에 꼭 다문 입까지 딸의 어릴 때 모습 그대로입니다. 갑자기 딸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까지 늦도록 젖을 먹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딸아이는 유치원 가방을 던지자마자 엄마 품을 파고들어 가슴을 뒤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젖을 떼고 난 후부터 이상한 버릇이 생겼답니다. 혀를 입술 밖으로 쏙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번 주의를 주어도 버릇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어느새 입술 밖으로 혀를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보 같다고 하면 순간 혀를 입안으로 감추었다 내 밀곤 했습니다.
비를 흠뻑 맞고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날, 또 혀를 내 밀고 집에 들어서는 것이 아닙니까! 할머니는 얼른 데리고 방에 들어가 가위로 잘라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말에 기절 할 듯 낮 빛이 파래졌습니다.
"또 혀 내 밀 거야?" 딸애는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하윤이가 엄마 어릴 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서 들려준 외할머니의 이야기였습니다.
"할머니,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어요?"
딸아이는 가위로 자른다는 말에 기겁을 하였는지 그 나쁜 습관을 고쳤답니다.
하윤이는 아직도 소록소록 잠을 자고 있습니다. 성밖숲에 도착해서 깨워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윤아 작은시 왔다!"
할머니는 하윤이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큰 소리를 치셨습니다. 하윤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할머니 무슨 소리에요?"
"작은시 왔다"
"작은시가 뭔데?"
할머니는 하윤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성밖숲 늙은 왕 버들 아래 벤치에 앉았습니다. 사백년 늙은 왕 버들 아래 맥문동 꽃이 그늘에서 더욱 짙은 보랏빛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 동공처럼 깊고 파랗게 할머니와 하윤이를 응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할머니! 작은시가 뭐냐고요?"
할머니는 순간 사십 여 년 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작은시는 외할머니께서 어렸을 때 외할머니의 외할머니께서 들려주셨던 이야기입니다.
작은시는 외할머니가 살던 동네에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정신이 이상한 아저씨의 이름이란다. 그 아저씨는 머리를 무섭게 산발을 하고 다녔어요. 수염도 깍지 않고 떨어진 옷을 걸쳐 입은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못해 불쌍해 보였어. 아이들만 보면 나는 "작은시다"하고 막대기를 마구 휘둘렀단다. 아이들은 "작은시다" 소리만 들어도 귀신을 만난 듯 무서워했지. 울던 아이도 뚝 그쳤으니까...
그 아저씨는 양팔에 시계를 열 개쯤 끼고 다니고 발목에도 시계를 차고 다녔단다. 어떤 때는 머리도 깨끗이 씻고 말끔하게 다니면서 "시계 하나 줄게 같이 노~ 올 자"
웃음으로 다가가도 아이들은 도망 다니기에 바빴단다. 그런데 아저씨가 한동안 동네에서 보이지 않았데. 그리곤 아저씨가 내 시계 내 시계 하면서 미친 듯이 뛰어 다니더래, 그래서 동네 어른들이 그 아저씨를 묶어 자기 집에 가둬 버렸는데 그 후 아저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 이상한 것은 그 집에서 벽시계, 탁상시계, 손목시계가 백여 개나 나왔다는 거야.
외할머니는 "재미없지?" 하시며 일어서신다. 그 많은 시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다음에 꼭 여쭈어 볼 작정이다.
늙은 왕 버들은 힘없이 가지를 드리우고 그늘을 짙게 만들어 주었어요. 뜨거운 태양 밑에서 시원한 그늘을 토해 내려니 힘이 다 빠지나 봅니다. 외할머니는 하윤이 손을 잡고 숲길을 거닐면서도 생각에 잠기시나 봅니다.
"하윤아 우리 저 쪽으로 가 볼까?"
"그 쪽에 뭐가 있어요? 할머니"
"아름다운 실개천이 있단다. 이름은 이천이야"
할머니와 하윤이는 숲을 끼고 있는 이천 둑을 걸으면서 푸르고 맑게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