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꼭 자랑해야 하거나 자랑할 게 생긴다. 크게는 위인자랑 선헌자랑, 작게는 조상자랑 부모자랑이다. 할수록 빛이 나는 것이 자랑의 본령이다.
그러나 자화자찬이라 하듯 제 자랑은 주착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추태이다. 그래서 아내자랑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라 하는 모양이다. 손자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지만 애교로 봐 준다. 이는 아마도 악의 없이 샘을 보는 인간의 원초적 시기심의 한 유형 정도로 봐 줄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유독 자랑이 심한 곳은 동창회다. 유소년 때의 재기발랄하고 순진무구했을 때의 동심으로 돌아가 그 연장선상으로 착각하고 자랑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차, 패션, 장신구 등도 슬쩍 끼워 넣는다. 그래서 그 꼴 보기 싫어 아예 참여도 안 한다는 사람도 있다 한다.
또 있다. 등산동호회다. 이름 자체에 함의(含意)가 있듯 허물없이 친근함을 누릴 수는 있지만 자랑을 늘어놓는 데선 예외 없이 눈총을 맞는다. 여기선 주로 손자 자랑이 압권이라는데 하도 많이 하니까 벌금 10만 원이라는 규율을 정했다. 그랬지만 얼마간 근신(?)을 하더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이듯 그 규율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한다.
자랑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은 정작 본인은 그게 자랑 삼아 하는 줄은 모른다. 아니 의식적으로 자랑이 아니라 `얘기`를 한다고 펄쩍 뛴다. 세상사는 `자기본위`라는데 어쩌면 그 범주를 벗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어쩌나! 정말 어쩌나! 나는 자랑을 좀 해야겠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자랑이지만, 또 다르게 보면 갓 났을 때부터 커가는 모습이 그렇게 신기하고 그게 바로 가벼운 흥분과 감동이니 그걸 구태여 표출을 하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인간의 본능이 별것인가. 세상에 손자 귀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배밀이로부터 뒤집기, 옹알이 등 그 예쁘게 자라는 모습을 혼자만 볼 수 없었든지 아내가 내게 재탕 삼탕으로 들려준 얘기들이 있다.
중 2년, 초교 4년 두 명의 외손녀가 있다. 동태동북 자매인데 성정은 왜 그리도 다른지 모르겠다. 큰애가 차분하고 내향적이면 작은애는 활달하고 외향적이다. 큰애가 숙고형이라면 작은애는 덜렁대는 즉흥형이다. 사내 같이 덜렁대기도 하지만 웃기기도 한다. 다리를 다쳐 절면서 돌아다니는 애를 보고 조심하랬더니 성한 다리로만 뛰는 시늉을 해 보인다. 큰애 네 살일 때 제주도 여행을 갔었는데 공항에서 격납고 비행기를 내려다보고 와, 왕비행기다! 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림책 비행기만 봐오다가 실물을 보니 그게 그렇게 놀라웠던 모양이다.
큰애 예닐곱 살일 때 커가는 모습이 하도 예뻐 `요년이···` 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애가 `···년이 뭐야! 왜 욕해?` 깜짝 놀란 내가, `그건 귀하고 예쁜 애한테만 쓰는 말이란다` 라고 해도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귀한 아들 이름을 `똥개`로 짓듯 이른바 가학으로 얻는 쾌감 같은 것이라고 쉽게 설명을 해도 끝내 이해를 못 하는 것이었다.
내 외손녀 얘기와 그 실마리나 내용면에서는 아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지금은 남의 아이한테도 함부로 예쁘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 정서이다. 지하철에서 남의 아이 예쁘다고 볼을 살짝 만졌다가 젊은 엄마로부터 항의를 받았다는 얘기는 변화하는 세태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랬던 애가 중 2가 괴더니 초경을 시작했다. 샘 많고 호기심 많은 초교 4년짜리 작은애가 제 외할머니를 보고, `할머니! 나는 왜 저거 안 해?` `뭐?! 허허허···, 너도 더 크면 한단다.` `아! 그렇구나, 히히···`라 해서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듣고 있던 제 언니가 `너도 해봐라 얼마나 귀찮은가···`라며 한마디 거들었단다.
내 사위는 직장에서 외부 손님 접대로 음주하고 늦는 날 이 다반사이다. 어느 날 또 늦은 제 아버지를 보고 `거 봐 또 술 먹었지? 내가 술 좀 덜 먹으라고 그랬어 안 그랬어? 아빤 우리들 말 안 듣는다고만 하지 말고 아빠도 우리 말 좀 들어! 이건 약과다. 해외 출장이 잦은 제 아빠에게 그 전날 밤이면 빠지지 않고, 외국 가서 차 조심하고 술도 많이 먹지 말고 집에 전화 꼭 하라고 주의를 준다.
조선시대 유교적 이념이 사회의 기본 질서일 때 부모와 자식 사이는 공정과 자애의 관계였는데 오늘에 와서는, 모든 가정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양태가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공경자애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방법의 문제라는 말이다. 특히 아버지는 엄격한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친구 같은 사이가 됐다는 말이며 아버지는 공경은 하지만 엄하고, 엄마는 자애는 하지만 전통적 모자상은 많이 변해버린 지 오래라는 말이다.
지금도 삼강오륜 등 시대의 변화에 따른 `밥상머리 교육`이 철저한 가문이 있겠지만 사회 변천에 따라 공경자애의 양태가 변형이 온 것이 일반적이라는 말이다.
특히 우리 집은 초교생 둘째 외손녀가 변형된 관계의 전형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아빠 차 조심···` 이라는, 주객이 전도되고 만 것이다.
외손녀들에게 이모부가 둘 있는데 그곳(외국)서 인질극이 벌어졌다. 제 할머니가 **서방, ○○서방은 괜찮은가 모르겠다고 걱정을 했다. 평소 제 아빠 호칭도 조(趙)서방이니 이를 듣고 있던 둘째 외손녀가, "할머니는 도대체 서방이 몇이야···?" 라고 했으니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서방의 뜻이 남편인가 혹은 사위의 호칭인가를 구분을 하고 하는지의 여부는 여기서는 별 의미가 없다. 앞뒤 견주지 않고 불쑥 뱉어버린 그 말이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가 폭소의 진원지였다. 때 아닌 요절복통을 부른 이 녀석(사실 녀석은 아니지만 오늘만은 이렇게 부르고 싶다)이 우리 가정을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 모른다. ···이 몇이냐고? 에잇! 이런···!? 이럴 땐 꼭 `이런 백정냔······!?` 하고 싶은데 큰애의 `요년···`이 생각나 내가 참는다. 어어! 이미 뱉어버렸는데 이를 어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