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30일 콜롬비아 플로렌시아 타멕 공항에 헬기 한 대가 착륙한다. 군복을 입은 30대 남자가 환한 미소를 띠며 내려선다. 백발의 아버지가 흰 꽃을 들고 다가가 뜨겁게 포옹한다. 12년간 아들을 기다려온 아버지의 양 팔목엔 여전히 무거운 쇠사슬이 감겨 있다. 콜롬비아 좌익 게릴라 조직인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PC)에 납치되었던 파블로 에밀리오 몬카요 하사가 석방된 것이다.
몬카요 하사는 1997년 12월 21일 남부 산악지대 기지에서 FARC의 공격을 받아 인질로 잡혔다. 그때 나이 19세.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는 가족 품으로 돌아 올 수 없었다.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았던 그에게 정부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들도 그를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시골 고등학교 교사인 아버지 구스타보는 아들의 석방을 위해 나섰다. 2007년 6월 29일 반군이 포로를 묶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쇠사슬로 양 손을 묶고 목에 두른 채 전국 도보행진을 시작했다. 그의 흰 셔츠엔 반군단체가 공개한 자기 아들의 얼굴 사진을 새겼다. 그리고 한 달 동안 1000Km를 걸어 전국을 누비며 아들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발은 물집이 잡히고 부르텄다.
구스타보의 고행 이유는 단 하나. 교착상태의 포로교환을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 달라는 것이었다. 콜롬비아 정부뿐 아니라 베네수엘라, 프랑스 등 각국 정부에도 아들의 석방 지원을 탄원했다. 그의 행진으로 몬카요 억류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FARC의 신임을 받는 좌파 정치인 피에다드 코르도바 상원의원이 나섰다. 콜롬비아 정부와 FARC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결국 FARC는 몬카요 하사를 포함한 2명의 인질을 석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코르도바 의원과 적십자사 관계자들은 이날 콜롬비아 남부 정글에서 몬카요의 신병을 넘겨받았다. 구스타보는 "내 두 눈으로 아들의 자유함을 보기 전까지는 내 두 손목의 쇠사슬을 풀 수 없다"고 말하면서 아들을 만나는 그 자리까지 쇠사슬을 두른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갔던 것이다.
아들은 하나님과 아버지께 감사하면서 "내가 이렇게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한시도 아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란 참 가슴시린 이름이다. 자식들의 밥 그릇을 지키기 위해 하루에도 다섯 번 허리 굽히고, 여섯 번 자존심을 죽인다. 온갖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내 자식은 나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소 팔고 몸 부수며 자식들 공부시켜 오늘의 이 나라를 만들어냈다.
영화 `국제시장`이 아버지를 또 불러낸다. 한국전쟁 때 피란 내려와 부산 국제시장에 정착한 윤덕수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다. 1300만이 넘는 관객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기들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1960년 12월 23일 흥남부두. 어린 아들 덕수는 업고 있던 여동생 막순이를 잃어버린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찾아 나서며 울먹이는 덕수에게 말한다. "내가 없으면 장남인 니가 가장인 것 알지? 가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이 제일 먼저다. 시방부터 니가 가장이니까 가족을 잘 챙기라."
흥남철수의 배 안에서 비극적으로 아버지와 여동생을 생이별한 어린 덕수는 한 순간에 가장의 존재를 상징하는 두루마기를 아버지한테 물려받고, 아버지가 유언처럼 당부한 부산 국제시장으로 피란, 고모 가게인 `꽃분이`를 찾는다. 그의 `꽃분이 시대`는 고통과 시련, 혼란과 좌절의 한국 현대사의 압축이다. 덕수는 진학도 선장의 꿈도 포기한 채 피란민의 생존 싸움 현장에서 온 몸을 던져 피투성이로 산다. 파독 광부·월남기술자 파견을 자처하여 가족의 품을 떠난다. 독일에서 광산폭발 사고, 월남에서 총격전을 겪지만 `기가막힌 웅덩이`에서 살아난다.
남동생 등록금 때문에 독일 탄광에 갔다 온 그가 여동생 시집갈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월남에 가겠다고 하자 아내가 울먹인다. "왜 당신의 인생인데 단 한 순간도 그 안에 당신은 없느냐"고. 그러나 덕수는 생각한다. "그래도 그놈의 전쟁을, 독일 탄광을, 월남에서의 고생을 내가 겪었으니 망정이지 우리 새끼들이 겪었으면 어쩔 뻔했어."
어느새 70대 초반에 이른 덕수, 아버지는 찾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전쟁고아로 입양되어 살던 여동생 막순이를 찾고, 그렇게도 고수하던 꽃분이네 가게도 내어놓고, 생존보전의 표상이던 아버지의 두루마기를 끌어안고 하소연한다. "아부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진짜 내 힘들었거든예."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 중에서 사실 전혀 모르는 것이 많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집집마다 `구스타보`가 있고 `덕수`가 숨쉰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2015.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