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이 발발한 지 6개월째인 1950년 강풍이 몰아치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의 흥남부두에서 선장 마리너스 레너드 라루는 건조된 지 5년 된 7.607톤급의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 갑판에 서 있었다.  그는 쌍안경으로 해변을 살폈는데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북한 피란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거나,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나왔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들처럼 그들의 아이들이 있었다. 라루 선장은 약 10만 명의 겁에 질린 북한 피란민, 즉 모든 전쟁의 죄 없는 희생자들인 노인, 여성, 아이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장진호에서 포위되었던 연합군은 많은 희생을 내게 되었다. 그래서 12월 중순 연합군의 주축이 된 미 육군과 해병대는 장진호 포위를 돌파하고 함정들이 대기하고 있던 흥남항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철수하게 된다. 대부분의 부대는 이미 서둘러 철수했고, 도시는 적의 포화로 화염에 싸여 있었다.  차일즈 대령은 라루 선장에게 그의 배가 항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배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며 적군이 포위망을 빠르게 좁혀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상급선원들과 승무원들 외에는 승객을 태울 수 있도록 설비되어 있지 않으므로 선장에게 피란민을 태우라고 명령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대령은 상급선원들과 협의해서 결정하라고 했으나 선장은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배를 가지고 들어가서 가능한 한 많은 피란민들을 태우기로 결심했다. 상급선원 중 어느 누구도 선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배는 승무원 35명과 상급선원 12명만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12명 정도 더 탈 수 있는 공간은 있었지만 수용 시설은 없었다. 그러므로 얼마의 피란민이 승선하든지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만원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 중 죽음의 무르반스크 항로에서 화물을 운반했던 라루 선장은 일등항해사 사바스티오에게 명했다. "피란민들을 승선시키시오. 그리고 승선한 피란민들이 1만 명에 달하면 나에게 보고하시오." 1만 명이 승선 인원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장과 함께 주역을 담당했던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피란민들은 마치 화물처럼 실렸습니다. 그들은 배의 모든 화물 창고와 갑판 사이의 공간에 실렸죠. 그들에게 제공할 물도 없고, 의사도 통역도 없었습니다. 기온은 영하인데 화물 창고에는 남방도 전기도 없었습니다. 화장실도 없었죠. 그들은 모든 소지품을 가지고 승선했죠. 아이들이 아이들을 업고 있었고, 어머니들은 젖먹이를 안은 채 다른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고, 노인들은 아껴둔 음식과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보았어요. 우리는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한국어 중 하나인 "빨리 빨리"를 외쳐댔죠. 한 명이라도 더 태울 생각뿐이었어요."  피란민이 승선로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을 때 대부분의 미군은 이미 탈출한 상태였고, 중공군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적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승무원들이 가능한 한 많은 피란민들을 태우고 있을 때 라루 선장은 배가 공해를 향하도록 기수를 돌려놓고 계속 엔진을 가동하게 했다, 여차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 상급선원은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건 완전히 미친 짓이었어요. 서커스에서 광대가 하는 농담처럼, 12명의 거인이 한 대의 소형차에 올라탔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상급선원들과 승무원들이 피란민의 승선작업을 끝냈을 때 그 배에는 14.000명이 타고 있었다. 한 명의 희생자 없이, 오히려 5명의 신생아를 더하여 적군의 기뢰를 뚫고 3일간의 항해 끝에 25일 크리스마스에 마침내 거제도에 닻을 내렸다. 단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인원을 구한 세계기록으로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후에 성 베네딕도회 뉴튼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일생을 봉헌한 마리너스 라루 선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생각 합니다. 그러면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저에게 옵니다."  훗날 선장에 대한 감회가 남달리 깊었던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가 라루 선장에게 물었다. "그때 왜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까?" 그는 대답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13)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라루 선장의 사랑이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기적을 일으켰다.  그가 섬겼던 뉴튼수도원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되자 한국의 경상북도 왜관수도원에서 지원을 결정했다. 50년 전 자신의 결단이 이렇게 돌아올 줄 라루 선장은 알았을까? 이 결정 이틀 뒤인 2001년 10월 14일 라루 수사는 세상을 떠났다. 뉴튼수도원은 지금도 왜관수도원에서 운영 중이다. (2015. 3. 2.)
최종편집:2025-08-14 오후 06: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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