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일본 함대가 러시아 점유의 뤼순(旅順)군항을 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1905년 1월 1일, 일본 육군은 뤼순의 러시아군 요새를 함락했고, 5월 29일에는 해군이 대한해협 해전에서 발틱함대를 무릎 꿇게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일본은 러시아 수도인 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할 힘이 없었고, 차르는 한 푼의 전쟁 배상금도 `작은 일본 원숭이`에게 줄 생각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일본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러시아와의 협상 중개를 요청했다. 이에 루스벨트는 1905년 7월 육군장관 태프트를 도쿄에 급파했다. 그는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와 밀담을 가졌다. "미국은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Katsra-Taft Secret Agreement)을 맺었다.  루스벨트는 이 밀약을 바탕으로 중재에 나섰다. 9월 5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일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조약 체결 후 체약국의 희비는 엇갈렸다. 협상장을 나선 러시아 대표는 "단 한 코페이카의 배상금도 주지 않는다. 우리의 완전 승리다"라고 말했다. 반면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전장에서 승리하고 회담장에서 패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일본의 만주 독식을 막기 위해 러시아 편을 든 루스벨트는 한국을 제물로 일본을 달랬다.  미·일의 밀거래를 알 리 없던 고종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엘리스의 방한 소식에 희망을 걸었다. 9월 19일, 인천항에 내린 `미국 공주`에게 황제 전용열차를 내주었고, 선례가 없는 만찬을 베푸는 등 극진한 대접을 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소뿐이었다. 미국은 영세중립을 통해서 대한제국을 지키고자 했던 고종의 간절한 호소를 냉정하게 물리치고 한국을 일본의 먹잇감으로 던져주었다. 미·일의 밀약대로 일본은 조선 지배를 인정받아 11월 17일에 조선과 을사보호능약을 강압적으로 맺고 외교권을 박탈했다.  1차대전 이후 극동지역에 대한 영·불·독의 영향력이 퇴조하면서 일본의 주도적 위치가 굳어졌다. 1932년 만주 침략, 1937년 중국 본토 침략이 그것을 말해준다. 대공황이 일어나자 자원 조달을 위해 동남아, 인도차이나 반도로 전선을 확대했다. 미국은 1938년까지도 일본에 군수물자를 수출하여 잇속을 챙겼다.  1941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하자 동력이 끊어진 일본은, 12월 7일, 진주만을 기습공격했다. 일본의 선전포고에 따라 미국이 2차대전에 참가하게 되었고,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돌연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는 한반도로 진군했다. 미국이 내심 반대했던 소련의 참전이 동아시아 역사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2차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를 이끌었던 인사들을 앞세워 소련 견제에 나섰다.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해 수많은 전범들을 풀어주었다. 인적 청산뿐 아니라 전후 처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에 한국을 초대하지 않았다. 미국의 결정으로 한국은 일본의 교전 상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배상을 요구할 자격을 잃었다.  미국의 계속적인 압박으로 열린 1965년 한일협정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청구권 형식으로 귀결된 것도 사실상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문이다. 독도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영토 중 독도를 슬그머니 누락시켰다. 5차 초안까지 들어 있었던 독도가 일본의 로비로 사라진 후유증은 얼마나 참담한가!  역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당사자는 바로 미국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성찰 없이 `역사` 문제에 연연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크다. 한국을 방문했던 미 국방장관은 "역사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고, 미 국무장관 역시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일본 쪽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이지 않은 채 "한·일 양국이 자제심을 갖고 계속 대화하며 해결책을 찾기 바란다"고 함으로써 일본 편을 들었다.  미국의 대북강경론과 친일적 태도는 지난 4월 말 미일정상회담과 방위협력지침 개정 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두 나라는 중국과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군사 일체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우리나라에 압박한다. 이런 과정에서 핵 등 북한 관련 문제를 대화로 풀기 위한 동력은 줄고 있다. 미국의 이런 움직임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과거사 문제를 실종시키고 북한 핵·미사일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만들며 동북아 대결 구도를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는 유일한 활로는 역시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개선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북한에 대한 유연성을 되살려야 한다. 냉전 논리가 판을 치던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 손으로라도 적과 손을 잡고 있으면 적이 쳐들어올지 어떨지 알 수 있다"면서 남북대화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외교적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유연해야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재앙을 기회로 만들 수 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지 말고, 믿을 수 없는 `럭비공` 같은 `북`의 손을 잡아라. (2015.6.10)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3:4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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