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달을 맞아 필자의 머리 속에는 나라를 위해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은공에 자연히 머리 숙여진다. 그 많은 지사들 中에서도 어려서부터 들어온 안중근 의사의 애국정신과 용맹 무쌍한 투쟁정신은 나의 머리 속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100년 전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에서 中·韓 양국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 원흉 이등박문을 격살한 것은 세계를 진감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다. 안중근은 영용한 애국자이고 동양 평화의 수호자이며 세계위인의 한 사람이다.  중국 古代의 사마천은 "사람은 한번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홍모(鴻毛)보다 가벼울 수도 있다"고 하였다. 민족과 나라를 위한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침략자를 대신한 죽음은 홍모보다 가볍다.  1905년의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이때 분개한 중신 민영환은 자살로써 `5조`를 반대했다. 안중근은 이런 자살은 찬양할 것은 못되고 그는 이병을 거느리고 일본 침략자와 싸우다 희생된 최익현을 높이 평가하였다. 안중근은 불의와 침략자 앞에서 투쟁을 회피하는 것은 잘못이며 자신의 힘이 약하다고 자살을 한다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반드시 일어나 싸워야 한다. 싸우는 중에 희생이 생기는 것은 피면할 수 없는 일이며 희생이 있어야 더 많은 사람을 교육하고 단결하여 최후의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때문에 일 떠나 싸우는 것만이 더욱 가치 있는 선택이라고 여겼다. 지금은 적이 강하고 우리가 약하니 적을 경시할 수 없다. 한번의 의거로서 성공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이치이다. 10년, 100년이 걸려서라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결심을 실제행동으로 열심히 표현하였다. 그는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국내서 수차 적과 투쟁을 전개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그는 투쟁의 장기성과 간고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고 비밀리에 단지동맹을 조직하여 새로운 큰 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그는 하얼빈 역에서 한국과 중국을 침략한 원흉 이등박문을 죽이고 2천만 동포와 나라의 원수를 갚았으며 중조(中, 朝) 인민의 항일 투쟁을 추진하였다. 체포된 후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이등의 죄목을 일일이 폭로하고 그들의 유혹에 조금도 동요없이 끝까지 혈전을 진행했다.  1910년 2월 14일 여순법정은 안중근을 사형에 언도했다. 이 판결은 안중근이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때문에 그는 얼국색 하나 변치 않고 고개 들고 떳떳하게 법정에 나섰다. 감옥에 돌아간 후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자신의 기개를 표달했다.  "장부(丈夫)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철과 같이 굳고 의사(義士)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그 기풍은 구름 같이 높도다"  3월 26일은 안중근의 마지막 날이었다. 집행 두시간 전 그는 또 "나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다(爲國獻身軍人本分)라는 저명한 제사를 남겼다. 사형장에서 그는 "나는 대한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죽으니 죽어 유감이 없다"고 말하고 장열한 최후를 마쳤다.  안중근의 애국주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를 격려할 것이며, 안중근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中國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에 안중근 기념관이 설립되었고, 하얼빈공업대학에는 안중근 장학회가 설립되었다.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2: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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