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모든 부모들은 나이가 들면 자식들에게 얹혀사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었다. 일정하게 하는 일도 없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늙은 부모들의 생활력도 그전보다 훨씬 좋아지면서 지금은 노부모의 70% 이상이 따로 살기를 원한다. 자식들과 함께 사는 일이 서로 불편한 점도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아들 내외는 소문난 효자이지만 우리 내외가 만일 아들네 집에 가서 산다고 하면, 여름철에 설령 집안에서라 할지라도 T셔츠와 속옷 바람으로 지낼 수는 없을 듯하다. 그래서 우리 내외는 셋째 딸 미정이가 유학 길을 떠난 때부터, 그러니까 거의 23년간을 우리끼리 살고 있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나름대로 두 사람만의 삶을 꾸려가는 일에 상당히 익숙해졌다. 이러한 우리의 비둘기 인생을 아내는 무척이나 편안해하고 행복하게 여기고 있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 많은 늙은이들은 매달 자식이 보내주는 생활비나 용돈을 목마르게 기다린다고 한다. 대개는 통장으로 돈이 잘 들어오지만 간혹 제때에 입금되지 않은 경우에는 속이 탄다는 것이다. 돈을 속히 보내라고 독촉할 수도 없고, 막연하게 기다리자니 애가 타서 저절로 자식(들)을 원망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한두 달도 아니고, 일이 년도 아닌 이런 노후 생활이 계속되는 것을 비관해서 스스로 사는 일을 접는 노인들이 있다는 것도 가끔 보도된다.
우리 내외는 이런 걸 모르고 산다. 내가 정년퇴직을 한 후에도 매월 25일이면 일정액의 공무원 연금이 나온다. 두 내외가 먹고 살기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연금을 타게 되니 우리의 노후 생활은 대단히 안정되고 편안하다. 매달 일정한 날에 연금을 조달받는 아내는 그것으로 일용할 양식부터 아파트 관리비 등을 물고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며 이렇게 연금으로 노후 생활을 즐기고 있는 자기를 매우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당신이 오래 살아야 하니 건강관리를 잘하라고 성화가 대단하다.
며칠 전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다음날 그 위에 비까지 와서 도로가 눈 범벅이 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미끄러져 다쳤는지 모른다. 다음날 신문을 보니 서울에서 낙상한 사람(그래서 병원신세를 진 사람)의 수가 350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아내는 자기도 그날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파스 두 장을 바르면 되는 정도의 가벼운 부상이었다고 좋아하였다. 아내가 빙판 길에 넘어졌던 그날, 집에 돌아온 아내는 난방을 때서 집안이 훈훈해지자 소파에 드러누워서 미끌어 넘어지기는 했으나 그만하기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면서 감사히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미희(둘째 딸)가 갖다 준 쌀 한 포대(40kg)가 있고, 김장해서 독 안에 김치도 많이 있고, 때마침 제자가 사서 보내준 맛좋은 거창 사과 한 상자(65개)가 있으니 자기는 등 따시고 배부른 사람이라고 하면서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상관없이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지 아니한가?"라고 노래하며 살았는데 자기는 그런 사람들보다 백배는 더 잘 살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연 4,000만 원이 넘는 고액 연금자에게 건강보험료를 매월 20만 원가량 부과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걱정하는 눈치가 역력하였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아내는 정녕 행복해 보였다. 늘 듣는 것이긴 하나 오늘도 아내가 부르는 행복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도 인생의 행복감을 만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