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신사 맞은 편에 조선인의 `코무덤`이 있다. 그 코무덤을 만든 자가 바로 그 신사의 주인공이요, 임진·정유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1592년(임진년) 4월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해 전국을 짓밟고 1년 만에 서울을 물러나면서 화평 조건을 제시했다.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등 7개 조항이 이행되지 않자 1597년(정유년)에 조선반도 남부를 재침략한 도요토미는 조선인을 잡아 머리 대신 코를 베어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 해 8월부터 두어 달 동안 극악무도한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조선 군사와 백성을 잡아 죽이고 코를 베어내 교토로 보냈다. 그 코가 12만6천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본부가 2007년부터 해마다 11월이면 그곳에 가서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낸다. 교토시가 세운 코무덤 안내판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써 막을 내렸으니, 전란이 남긴 이 무덤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유훈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400여 년 전에 조선을 유린했던 일본은 300년 뒤 다시 한반도를 침탈했다. 동학농민봉기로 청·일이 조선에서 충돌하게 되고 양국의 교섭이 순조롭지 않자 일본은 단독적으로 내정에 간섭하려고 1894년 군대를 앞세워 경복궁에 난입하며 위협을 가했다. 이에 자극되어 이 해 9월에 동학농민이 재차 봉기하여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는 기개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타 연발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스나이더 소총은 총알이 회전하며 날아가고, 무라타 연발총은 장전 시간이 줄어 모두 엄청난 살상력을 보였다. 농민군은 쏠 때마다 불을 붙여야 하는 화승총이 고작이었고 그마저 없어 죽창을 꼬나든 농민군도 허다했다. 일본군은 농민군의 씨를 말리겠다는 기세로 덤벼들었다. 일본군이 농민군 7명을 붙잡아 구호에 맞춰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이를 마을 주민들이 보도록 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농민군은 참패했다. 연구자에 따라 농민군 희생자를 최대 30만까지로 본다. 이노우에 가쓰오(井上勝生), 홋카이도대 교수는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에서 이를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종족대량학살)`라고까지 평한다. 일본군 전사자는 동학농민전쟁을 통틀어 1명뿐이었다. 이노우에 교수는 "동학농민전쟁 때 일본군이 만민의 한을 남겼다"고 했다.  단풍이 곱게 익어가는 시월의 가을, 1895년 10월 8일, 곤히 잠든 조선의 새벽을 깨운 것은 일본군과 낭인의 무리였다. 야수들은 얼굴을 가린 채 사다리를 타고 경복궁 담을 기어올랐다. 칼을 휘두르며 삽시간에 궐내 북쪽 건청궁으로 내달았다.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막아서자 칼로 쳐 참살했다. 고종의 멱살을 잡고 구석으로 내동댕이쳤다. 울부짖는 세자는 상투를 잡아 질질 끌고 다녔다.  야수들의 목표는 `여우 사냥`의 암호명이 붙은 명성황후였다. 이들은 옥호루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찾아내 잔인하게 살해했다. 시신은 근처에 있는 녹원 숲 속으로 옮겨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유골은 숲 속에 몰래 묻었다.  야수들은 범행에 앞서 흥선 대원군이 있던 공덕동 별장으로 쳐들어가 대원군을 강제로 교자에 태워 들러리로 세웠다. 왕실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위장하려는 술수였다. 하지만 이들의 만행을 똑똑히 지켜본 `진실의 눈`이 있었다. 궁궐 안에 있던 미국인 시위대 고문관 다이 장군과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한사코 범행을 부인한다. 사건 다음 날 주한 외교사절의 항의가 빗발치자 미우라 일본 공사는 "조선 훈련대 병사들이 한 짓이지 우리는 모르는 일이오"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제는 세계가 다 아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까지 부인한다. 그들의 철면피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히로시마의 하늘에는 섬광과 함께 죽음의 버섯 구름이 18km 상공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왜 인류 최초의 핵공격 지점이 하필 히로시마였을까? 히로시마는 임진·정유왜란 당시 조선침략의 전진기지였고,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병력을 보낸 대본영이 있었던 곳이며, 전 세계의 여론에 못이겨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지목된 48명의 용의자를 눈가림으로 재판해 무죄 방면했던 곳이다.  히로시마 원폭투하가 정유재란 때 코를 베인 12만6천 명, 일본군에 대량 학살 당한 30만 명의 동학농민군, 그리고 비참하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통함을 달래는 `버섯 구름 해원무`였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일본은 지난 날 우리나라에 대해 지은 죄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진정한 사죄를 해야 한다. 보다 엄중한 하늘의 경고가 내리기 전에. 특히 군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천이 지지면 만이 녹는다`. 일제 말에 많이 들었던 말이다. (2015.6.25)
최종편집:2025-08-14 오후 06: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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