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스런 가야산 정기 받고 수정 같던 대가천 맑은 물의 자양(滋養)으로 내가 나고 자라난 나의 법산···.  불러 보고 외쳐 봐도 따뜻하고 정감 어린 나의 고향 법산, 법산이다.  배산임수 뚜렷하여 산자수명이라고밖에 쓸 말이 없는 법산! 이 법산에 누가 터를 잡았을까? 나의 10대 선조이신 최항경(崔恒慶·아호 竹軒) 공께서 약관일 때 경학에 뜻을 두고 대현 한강 정구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기로 했으니 그것이 오늘의 이 복지(卜地)를 정하게 된 계기이며 이후 벌족하여 오늘의 우리 법산의 입향조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400년이 흐른 지금 영천최씨 일성 대촌이 되기에 이르렀다.  우리 지나온 70여년 역사의 변전을 어찌 한두 마디로 표현할까만 전래의 농경사회일 때의 생활양식은 오늘날에 비하면 의식주 모두가 그야말로 원시적이었다. 겨우내 끼었던 때, 설이나 돼야 물 덥힌 가마솥에 들어가 목욕을 했고 여름엔 소나기 맞는 것이 `샤워`였으며 때론 등목도 했지만 대가천 맑은 물은 바로 노천탕이 되는 시절이었다. 국도(당시는 신작로라 했다.) 따라 시냇물 흘렀으니 멱 감는 욕객(?)이나 오는 이 가는 이 모두 서로 개의치 않았다. 어쩌다 물 밖을 나올 때는 주요부를 손으로 가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이 당시의 농촌 풍정이었다.  노천탕은 신작로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꼬불꼬불 농로 따라 봇도랑이 있었다. 그 봇도랑에 젊은 시절부터 익살꾼으로 이름이 난 한 노인이 어느 날 완전 나체로 몸을 담그고 있었다. 지금은 청춘이지만 그땐 60대이면 노인이었다. 어떤 부녀자가 거길 지나가야 했다. 머뭇거리던 그 여인, 소쿠리로 옆얼굴 가리고 지나려 하는데 그 `해학덩어리`가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거길 손으로 가리고 발딱 일어나, `아이고! 들에 가십니까?`라고 했다. 요절복통은 이럴 때나 쓰는 말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런 `해학폭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도 당시는 큰 흉허물이 되지도 않는 시대였다. 더구나 노인임에는 누가 그것을 탓하겠는가.  산업화가 시작되며 그런 풍정도 변화해갔다. 농업 인구는 줄어들고 일요일엔 도시인들이 멱 감고 천렵하는 관광지가 돼가고 있었다. 내 고향 법산앞 시냇물, 깊은 곳은 2m도 넘는 시내를 우리는 청수가라 통칭했다. 거기서부터 작천앞 시내는 우리들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 영역을 외지인들에게 빼앗기기 시작했다. 이른바 반촌이라는 법산 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란 이전에는 어림도 없을 일이었지만 시대 변화는 어쩔 수 없는지 텃새를 부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벌거벗고 멱 감는 외지인들을 그냥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나도 훨씬 그 먼저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당시 청년 조직을 만들어 천렵·입욕금지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고는 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언필칭 민주화와 시민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는지 나체족은 없어졌지만 실효가 크게 없었다고 한다.  그랬는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 법산 중년 부인 한 분이 나섰다. 막대기 하나 들고 냇가 위아래를 순회하며 팬티만 걸친 천렵·행락객을 꾸짖기 시작했다. 막대기로 땅을 치고 으르며 `어디 남의 양반 동네에 와서 본 데 없이 벌거벗고 이러느냐`라고 하며 공중도덕이 뭔지를 가르치려는 듯 호통을 쳤다. 청년들보다 효과적이었다. 더러는 반항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부녀자 앞에서는 별 저항도 없었고 그나마도 한두 번 당해본 사람들은 팬티·러닝셔츠를 입는 등 기본은 차렸다 한다.  우리는 전래의 양속인 호칭법이 있다. 새색시 시집오면 ㅇㅇ댁이라 부른다. 생장한 곳이나 그 성씨의 관향을 붙인다. 막대기를 들고 호통을 친 부인이 바로 함안조씨이니 함안댁이 됨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는 유난히도 혼반(婚班)을 찾았다. 무례한 천렵·행락객을 내쫓는 것을 본 당시의 동네 뜻있는 분들의 화두는 역시 `남도 명가 함안조씨`는 다른 데가 있다고 칭송을 했다고 한다. 고위 공직자와 재벌들은 인맥·혼맥에다 학맥까지 고수하며 때론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한다. 계산적이고 유·불리를 따지는 이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혼맥이 바로 이 두 자매의 경우이다. 이 두 자매는 시차를 두고 우리 법산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그 중 한 분이 내 성주신문 기고문은 빠짐없이 본다고 근래에 와서 어느 지인을 통해 들은 얘기이다.  중국의 고사 지음(知音)을 들 것도 없이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기쁨이야말로 언설로는 다 표현할 길이 없다. 60년대 수륜고공교(현 수륜중학교) 시절에 한 책상에서 `아이엠아보이` 하던 친구는 중년을 넘어서 처음 만났더니 제일성 `너 문인단체 임원이나 교수인줄 알았다`고 해서 폭소와 함께 내 얼굴이 화끈한 적도 있다.  어쨌거나 누구라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그리 싫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큰 자산이 됨을 어쩌지 못한다. 비록 잡문 수준이지만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저명한 작가들은 이구동성 `글은 피를 찍어서 쓴다`라고 하듯 한 줄 글을 쓰기 위해 기울이는 사색과 명상과 고심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리라.  나의 고향 법산! 세계가 한 지붕아래인 것 같고 다문화 가정이 넘쳐나는 글로벌 시대에 고향 얘기 하자니 어쩐지 좀 머쓱하기도 하지만 고향은 고향인 것을 어쩌랴! 이런 고향 법산에 함안댁과 그 자매인 오산댁이라는 두 분이 있음에 커다란 자존감을 갖는다. 두 분 모두 건강하시길 빌며 이만 접을까 한다.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6: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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