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성주문화사업후원회의 새해 모임에서 최열곤 전 서울시교육감으로부터 시조집 섬 순례 연가를 기증받았다. 그 주제가 `해양개발 시대를 열자`라는 그의 인생 삼모작의 열정이 나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귀가하는 전철 속에서 노 교육자의 간절한 소망을 읽으면서 우리가 위대한 조상이나 문화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다는 일갈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었다.
우리나라 섬의 총 숫자는 3천153개에 달하고 있다. 그중 인간이 살고 있는 유인도가 453개중에서 1활에 상당하는 41개 섬을 대상으로 시를 읊고 있어 그 대상규모에 우선 놀랐다. 그리고 해양개발 시대를 열자란 노시인의 미래지향적 소망은 바다를 지배하는 민족이 곧 세계를 제패한다는 진리를 일깨우게 했다.
바다를 지배하는 민족의 활동 유형은 동서양이 각각 다르다. 서구의 대표적인 바이킹족은 씨족사회, 공동체사회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부족사회 및 국가사회로 확대되고 세계화로 뻗어나갔다. 반면에 동양의 대표적인 바다의 지배자 장보고의 경우는 신라백성을 괴롭히는 해적들을 소탕하는 애민정신에 바탕을 둔 리더십에서 시작되었다.
7-11세기 당시의 노르만족은 씨족 제 사회가 해체되고 계급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부족 간의 항쟁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족장은 그 부족민을 이끌고 삶의 근거지를 찾아 진출한 경우가 많았다. 일찍부터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그들에게 전쟁과 모험, 전리품의 갈망 등은 해외진출을 더욱 촉진시켰다. 무자비한 침입·싸움·약탈 등으로 `해적 민족`으로서 각지의 공포 대상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적 행위는 민족이동뿐 아니라 전투·정복·탐험·식민·교역 등 다양한 활동을 가져왔다. 근년에 바이킹의 유적·유물의 조사 연구결과 파괴적인 바이킹 정신은 긍정적 사고로 변화되어 왔다. 중세 유럽사회의 전 영역에 커다란 기여를 한 장대한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바이킹정신은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메리고 페스풋트 등으로 이어져 스페인 왕 카를로스1세에게 세계주항의 꿈을 이루게 하였고 서구의 세계화에 눈을 뜨게 하였다. 결국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로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출현에 이르게 된다.
반면에 장보고(張保皐)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청해진에서 18년간 활약했던 무장이자 무역상이다. 장보고의 해상활동정신은 서남해안의 해도 출신이란 이유로, 젊은 시절 당나라 서주 지역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장보고에 대한 정사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일본 천태종의 시조를 모신 교토의 적산서원엔 활을 든 장보고(?~846)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중국 산둥반도 영성시의 적산법화원에서도 장보고의 영정을 찾을 수 있다. 9세기 서남해안의 해적을 평정하고 당나라와 일본을 상대로 국제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는 우리 역사서보다 중국과 일본 역사서에 더 상세히 소개되고 높이 평가받는 국제적인 리더다.
당나라 최고 시인인 두목은 번천문집에 장보고 편을 따로 만들어 장보고의 일대기를 소상히 다루고 있다. 그는 장보고를 안녹산의 난을 정복한 곽분양장군에 비유하며, 명철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또한 일본 불교 천태종의 중흥조인 엔닌(圓仁)은 자신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당나라를 여행할 당시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갔던 인연을 소개하며 "평소에 받들어 모시지는 못했으나, 그의 고결한 인폼을 들어왔고 우러러 흠모함이 더해 간다"라는 편지를 남겨 장보고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신당서, 일본의 일본후기,‘속일본기`, 속 일본기, 속 일본후기 등에 소개되고 있는 역사상 드물게 보이는 국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말의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은 그의 탄생에서부터 인격적인 폄훼가 없지 않다.
장보고의 해상활동은 828년(흥덕왕 3)에 귀국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면서부터다. 신라의 무역상들을 괴롭히는 해적들을 소탕하는 등 활약을 펼쳐 당나라 신라 거주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다 이미 당나라에서 해상무역에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던 장보고는 귀국 후 제일 먼저 신라인들이 해적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노비로 팔리는 것을 막았다. 신라노라고 불리는 신라인 노비에 대한 매매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인 해적들을 중심으로 한 노비 매매 행위는 근절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신라의 일부 유민들까지 군소 해상 세력을 형성하고 동족을 당나라에 팔아넘기는 중간 상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장보고는 이러한 불순한 해상 세력의 활동이 신라, 당나라, 일본 삼국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척결을 다짐하고 청해진의 활동을 강화했던 것이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지로 지금 완도라 하는 곳이다. 대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어 청해에 설진하게 하니, 그 후로 해상에서 국인(신라인)을 파는 자가 어려워 졌다고 한다.
이 기록만 보면 마치 왕이 군사를 내주어 청해진을 설치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 청해진의 설치와 운영은 장보고의 영향력 아래 독자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봐야 한다. 청해진은 신라의 기존 군영들과는 그 성격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청해진 대사라는 직책 역시 오직 장보고에게만 쓰였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청해진은 무역선단을 이끌고 입국한 장보고가 본인의 역량으로 해상 기지를 꾸린 후 왕에게 재가를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던 신라 조정이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종국에는 장보고의 세력은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고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다 중앙 귀족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신라 귀족들이 장보고가 섬 출신이라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장보고는 결국 신라 왕실의 의뢰를 받은 염장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 이후 청해진은 폐쇄되고, 주민들은 벽골제 건설현장에 강제 이주된다. 장보고가 어렵게 건설한 동아시아 최대의 해상왕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 열도의 바다를 주름잡던 해상왕 장보고도 신라의 폐쇄적인 신분제의 벽을 허물지는 못했다. 거기다가 장보고의 죽음 이후 신라 또한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바로 장보고의 위세에 눌려있던 지방 호족들이 우후죽순처럼 세력을 과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보고의 이름은 1천년 이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다행히도 1935년도 일본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진단학회가 창설되어 진단학보 1,2권에서 "고대 무역 형태와 나말의 해상활동에 대하여-청해진 장보고 대사를 주로하야"에서 장보고의 정신이 부활하기도 했으나 일제의 식민사관이 용서하지 않았다.
해방된 조국 우리나라는 세계 7위의 수출국, 8위의 무역국, GDP구매력 12위국으로서 중진국 대열에 오르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최열곤 교육감의 유지를 받들어 해양개발시대를 열고 장보고의 개척정신을 이어받아 선진 조국통일을 조속히 이룩하기를 기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