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리 고향 성주에서 학교 다닐 때 만 해도 우리나라는 전통 농경사회였다. 그 시절은 중·고 진학률도 거의 50%(?) 수준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그 시절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학생이나, 학교 선생님, 교장 선생님까지도 자전거로 등?하교 하던 시절이었고, 성주군 농촌지도소장님이 겨우 오토바이로 군내 농촌을 순시하셨다.
자동차는 군수, 경찰서장만 지프차를 타고 다녀서 모든 이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1966년 1월 20일 나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그 해는 "올해는 일하는 해"라는 정부표어가 각 관공서나 학교 정문에 붙어 있었다.
졸업식 그날 우리 학교에 지프차 한 대가 도착하여 성주 군수님이 우리의 졸업을 축하하러 오셨다. 그 때 나의 머릿속에는 나도 장차 성장해서 군수가 한 번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여러 가지 사정상 대학 진학을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생으로) 국가가 신분을 보증하는 공무원이 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졸업 이듬해 부산에서 공직생활을(당시 5급을류) 시작하였으나, 그 직장이 나의 영원한 직장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1969년 6월 군입대와 동시 사표를 제출하였다.
군생활이 끝나고(1972년 5월) 나는 다시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고 1973년 9월 서울시 5급을류 공채 시험에 합격해 서울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때마침 나에게 희소식인 학비가 거의 무료에 가까운 서울대학교 부설 한국방송통신대학(지금은 독립된 국립종합대학교)이 생겨서 나는 행정학과에 입학, 공무원 생활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나는 국가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학업과 공무원 생활 모두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시절은(우리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접어드는 시기) 지금보다는 우리사회가 부정이 심했던 시대인가 보다.(내 자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못 느끼지만) 1975년 정부에서 `庶政刷新(서정쇄신)` 바람이 불었다. 그 때 우리 서울시에서는 각 분야별로 서울시 공무원들을 당시 한남동 서울시 공무원교육원에서(지금은 서초동 인재개발원으로 명칭, 장소 변경) 서정쇄신 교육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서울시 남문희 부시장께서는(지금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은 정확히 기억, 이분은 초등학교 졸업으로 말단 공무원에서 차관급까지 올라가신 분이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는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에게 서정쇄신 교육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분 백(Background)은 내 자신의 백이 최고다."란 말씀을 하시었다.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동원해서 쓰는 백은 한시적이지만, 내 스스로 힘을 길러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나의 가장 강한 영원한 백이 된다는 말씀을 나는 서울시 공무원 생활을 하는 동안 아니 나이 70이 된 지금까지도 이 말을 간직하며 살고 있다. 나의 공무원 초년병 시절(20대) 남문희 부시장의 그 말씀이 나의 어려웠던 공직생활과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지금은 그 부시장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그 분의 영향으로 (나의 본성도) 내 양심에 벗어나는 행동을 한 적 없이 나의 소신껏 공직생활을 하여 당초 내가 바랐던 군수(관선, 정부에서 임명)에 해당하는 직급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또한 학업도 계속하여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게 되었으니 크게 후회하는 삶은 살지 않았다며 자부해 본다.
공직퇴직 후(2007년)는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다 이제는 자원봉사를 하며 아직까지는 우리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