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7일 성주군문화원에서는 본군 문화원과 경북대영남문화원이공동 주최한 성주를 빛낸 역사인물 현양 행사를 개최했다.   나의 10대조이신 죽헌 최항경(竹軒 崔恒慶)의 그 삼부자와 성산인 등암 배상용(藤庵 裵商龍) 이 네 분의 현양 행사였다.   죽헌과 등암은 한강 정구의 한강학단 후학으로서 동시대를 사신 분들이다. 죽헌 삼부자에 대해서는 후손된 입장에서 학덕을 여기저기서 섭렵하고 존숭의 의미에서 살펴봤기 때문에 부끄러운 얘기지만 체계적 공부는 하지 못했고 그나마도 개괄적으로만 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의 행사에서 김시업 성균관대 교수와 경북대 이세동 교수의 강론은 다시 한 번 선조의 학덕을 숭앙하는 계기가 되어 더욱 큰 관심이 갔다.   사실 3년여 전에 `한강 선생과 나의 선조 죽헌공`이라는 제하의 글을 본보에 실은 일이 있다.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우리 후손들이 선조를 좀 알고 우리 선조가 어떤 분이었는지를 좀 더 알았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다시 한 번 쓰고 있다.   죽헌이 법산에 터를 잡게 된 연유와 한강학단에서의 족적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김시업 교수의 강의에서 언급이 없었던 것만 보충하고자 한다.   한강학단이라 했는데 이는 한강 정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들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제자들이 학단을 이룰 만한 이런 명현이야말로 우리 성주가 낳은 당대의 명문장일 뿐만 아니라 경학을 비롯하여 수학 병진(兵陣) 의약 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예학에 뛰어나 이에 관한 저술도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명현의 수제자라고 명명되는 우리 죽헌 선생은 그 후광만으로도 영예라고 한다면 감히 참람(僭濫)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결코 참람만은 아니다.   조선 유교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엄정한 사이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스승과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주고받음의 관계가 아니라 스승의 학덕에 매료되어 존경과 흠모를 하게 되고 스승은 제자의 호학과 덕행을 보고 사제가 된다는 말이다.   오늘날 너무 흔하게 쓰는 `멘토`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게다가 오늘의 극히 일부 혼탁한 사제의 상(像)을 생각하면 한강과 죽헌의 관계를 두고 첨언을 하는 것은 사족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한강은 죽헌을 일러 수하삼현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는가. 수하삼현이라 함은 죽헌의 장자 은과 차자 린을 두고 한 말인데 이를 두고 중국 당송팔대가에 든 소씨 일가의 3부자 즉 소순, 소식, 소철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를 두고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또 있다. 선친 죽헌과 마찬가지로 아들 형제가 학문과 저술에만 힘쓰다가 사마시에 동시에 올랐으니 이를 두고 연벽등과(聯壁登科·형제가 동시에 과거 급제)를 했다고 칭송했다. 훗날 죽헌이 돌아가고 죽헌의 동료 후학들이 학덕을 기려 오암서원을 창건하고 오늘날까지 향사를 이어오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수하삼현`이라 칭송하는 이 삼현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장자 은과 차자 린 삼부자를 불천위로 모셔져 있으니 이는 어느 서원에도 유례가 없는 우리 오암서원이 유일하다.   등암 배상용에 대해서는 저명한 명성만큼 깊이 있게 고찰한 적은 없지만 놀라운 사실 하나는 배등암이 역적과 충신을 오락가락한 배설 장군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이다.   영화 `명량`에서는,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하고 도망간 역적으로 묘사했는데, 성산배씨 종문에서 영화사를 상대로 오류 정정 제소를 했고 승소하기도 했다.   문제의 칠천량 해전은 이렇다. 당시 이 전투는 왜적들의 수륙양면 기습으로 장수들은 전사하고 전함은 대부분 불탔다. 원균도 이때 육지로 도망갔다. 보다 못한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러다간 전멸하겠다싶어 남은 수군과 12척 배를 이끌고 이들만이라도 살리자고 한산도로 퇴각했다. 질 것이 분명한 전쟁은 피하는 것이 지장(智將)의 한 역할이다.   도망인지 작전상 후퇴인지 당시 여러 정황으로 봐 설이 분분했는데 우호적인 쪽은 작전상 후퇴라고 하고 대척점에 섰던 장수들은 도망이라 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이순신도 한때는 배설을 못마땅해 했다고도 했으니 말이다. 배설은 성격이 소탈하고 소신도 있어 상급 장수들에게 아부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런 피해를 봤다고도 한다.   왜란이 끝나고 원종공신 1등에 책록한 사실을 두고 이세동 교수는 조정이 6년 전에 주살해 놓고 이제 와서 공신 책록이라니 참 무책임하다고 질타했다. 또 이후 신원도 하고 가선대부호조참판을 추증하였고 근세(1873년 고종10년)에 와서는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했다.   내 직장 사주가 성산인이기 때문에 더욱 관심 있게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래서 왜 복주(伏誅)가 되고 또 신원(伸寃)이 됐는지를 경청했었다.   이런 일련의 경우들을 보면서 역사 전말의 기록은 엄정한 팩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위대한 가르침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최종편집:2024-05-21 오전 11: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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