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본향 성주에도 진주 논개와 같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의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으니 자그만 자괴감이 먼저 든다. 중앙 일간지에 국채보상기념사업회 명예 이사장인 김영호 씨의 기고문이 실리었기 때문이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이 발상지인 대구에서 일어났을 때 대구거상 서상돈은 성금 100원을 내어 화제가 되었다. 거상이라 불리는 서상돈이 100원을 낼 때 당시 앵무라는 기생은 `국채보상은 국민의 의무···`라며 100원을 내놓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1907년 2월 6일자 대한매일신보가 기사화했다. 이름 하여 거상과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앵무는 한문·시·가무에 능했던 관기였으며 달성 권번(일제가 만든 기생조합)의 초대회장을 지낸, 성은 염씨로 염농산(농산은 앵무새가 많이 산다는 전설의 산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한 때 대구의 서화가 서병오, 달성공원과 함께 `대구삼절`로 불리기도 했다니 그 명성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어느 날 성주군 용암면의 한 농민이 `우리 집 옆에 앵무비가 있다`는 제보로 세상에 알려졌다. 비석 옆면에 `염농산제인공덕비`라 새겨져 있었고 축대에 향로도 놓여 있었다 한다.   이 비각을 `앵무빗집`이라 부르고 비석을 세운 때는 기미 5월 5일이라 했다. 성주군지에서 앵무의 출생은 1889년, 사망은 1946년으로 확인이 되었고 국채보상운동 때 100원을 기부한 것도 18세 때의 일이라 하니 더욱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었다. 용암면 들판은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계속되면 피해가 막심했다. 이를 본 앵무는 거액을 들여 제방을 쌓고 개울을 구축했다. 제방 이름은 두리방천이었다. 그 제방이 완공된 날 앵무는 학춤을 추었다 한다.   그래서 그 들판을 앵무들이라 불렀고 앵무빗돌을 세웠으며 양반골 성주에서 고을 원님보다 앵무를 더 칭송했다 한다.   앵무는 판소리 보급에도 앞장서 대구가 판소리의 중심이 되었다. 명창 박녹주도 이 무렵 앵무에게서 판소리를 사사했다는 사실에서 앵무의 위상을 더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평소 후배 기생들에게 `기생은 돈 많은 사람만 섬겨서는 안 된다.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또 친일파 경상 관찰사인 박중양이 유서 깊은 대구읍성과 객사 태평관을 없애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농성운동도 벌였다. 독립 만세를 외쳤던 기생조합 사건도 있어서 그 배후로 앵무가 지목됐다고도 하고,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비밀창구 역할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한다.   더욱 놀라운 일은, 1930년대의 대구의 명문 사학 교남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가 재정난에 빠졌을 때 앵무는 가진 재산의 반인 거금 2만 원을 쾌척하여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이다.   당시 신문은, 염농산과 김울산 두 여사가 교육 사업에 몸을 던져 장부가 하지 못한 일을 결행함으로써 수전노들의 심장을 자극했다고 썼다.   내 소년시절 주막이나 목로주점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기생(당시는 그렇게 통용)을 막말로 작부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철이 들면서 기생은 기적(妓籍)에 올라 있는 관기라 한다고 들었다.   조선시대 기생하면 우국충정의 의기 논개가 제일 먼저 떠오르고, 시·서·음률에도 독보적이었으며 절세의 풍류와 로망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명기 황진이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의기 논개는 붉으나 붉은 우국충정으로 적장 게타니(毛谷六助)를 수장시켜 여장부의 기개와 정열(貞烈)을 선양했고, 명기 황진이는 우리 국문학사상(해동가요, 청구영언 등에 실린 시조)에 크게 남긴 족적으로 우리들에게 각인이 되어 있다. 특히 황진이를 송도삼절이라 했듯, 우리 성주가 낳은 명기 앵무도 `대구삼절`로 불리기도 했다니 여기 다른 말은 사족이 되리라.   광복 다음 해, 앵무들 한 연못에 학 한 마리가 춤추듯 물속에 내렸다 하늘로 사라졌다. 앵무가 제방을 중수해 놓고 학춤을 추었던 연못이었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가보니 앵무가 흰옷을 입고 물에 빠져 있더라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인근 야산에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 무덤을 그 지역 연로한 분들은 앵무묘로 기억하고 있다. 무슨 신화처럼 그렇게 앵무는 `짧으나 굵은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20세기 전반 역사의 암흑기를 때로는 논개 같고, 때로는 제주도의 만덕 같은 모습으로 살다 간 그녀(앵무)로부터 영롱한 빛을 그렇게 많이 받고도 우리 근현대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라고 한 김명호 명예이사장 기고문의 말미는 세상을 향한 일갈(一喝)이었으며 보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어쩌면 이런 향토사를 이제야 알게 된 나의 과문함을 탓하고 나를 향한 질책의 정곡을 찌르는 것만 같기도 했다.
최종편집:2025-06-17 오전 1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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