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項羽)는 초(礎)나라 대장군 항연의 손자로, 반진(反秦) 봉기군인 숙부 항량을 따라 병법을 배웠다. B.C.209년 진승이 반진 봉기를 하자 항우는 항량과 함께 회계 태수 은통을 죽이고 스스로 부장이 되어 군사를 모았다. B.C. 208년 진승이 전사하여 반진 세력의 주력부대가 되고 항량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때 유방(劉邦)도 항량의 군대에 합류했다. B.C.207년 대장군 항우는 진나라 왕리에게 포위된 거룩성을 구하기 위해 진격하여 승리하고 왕리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곧 유방이 진의 수도 함양을 차지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함양 진입에 늦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유방을 치려고 경포를 시켜 함곡관을 함락하고 함양의 동남방 홍문에 진을 쳤다. 참모 범증의 건의에 따라 다음날 새벽 유방을 치기로 했다. 그런데 유방의 전략가 장량에게 매수된 항우의 당숙 항백이 항우에게 유방은 관중 왕의 뜻이 전혀 없다고 변호했다. 항우는 유방을 제거할 계획을 철회하고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범증은 항우에게 여러번 신호를 보내 유방을 죽일 것을 건의했으나 범증의 신호를 끝내 무시했다. 할 수 없이 범증은 심복 항장을 시켜 검무를 추다가 유방을 죽이라고 했으나 유방의 경호 담당 번쾌가 달려와 이를 저지하고 유방은 말을 달려 도망쳤다. 이 홍문의 연회로 인해 항우와 유방의 운명은 극명하게 달라졌다. B.C.206년 항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함양을 함락하고 진나라 황제 자영을 살해하고 아방궁에 불을 질러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패권을 장악한 항우는 서초패왕(西楚覇王)에 올라 팽성에 도읍을 정했다. 초 회왕은 의제(義帝)로 삼고, 유방을 견제하고자 사천성 방면으로 추방하듯 밀어냈다가 항백의 설득으로 한중의 제후 자리를 주었는데 이것이 제후들의 불만을 사게 했다. B.C.205년 유방은 항우가 반기를 든 제나라 정벌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팽성을 함락했다. 그러나 항우는 바로 서쪽으로 진격하여 유방의 군대를 무찌르고 유방은 형양으로 패주했다. B.C.203년 유방은 항우에게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할 것을 제안해 항우는 전세가 역전되고 있음을 느끼고 형양에서 병력을 철수했다. 그러나 B.C.202년 2월 한신을 비롯한 여러 제후국들과 연합한 유방은 50만 병력으로 해하에서 항우와 대치했다. 항우는 고작 500명의 군사만을 데리고 포위망을 뚫었다. 화현의 오강포까지 쫓겨난 그는 결국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사기`에는 해하에서 포위된 그의 마지막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어있다. "군량도 떨어지고 탈주병이 늘어나 남아 있는 병사는 매우 적었다. 어느 날 밤 사면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왔다. 항왕이 크게 놀래 말했다.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의 사람이 이리도 많은가(漢皆已得楚乎是何楚人之多也).` 술로 자신을 달래며 애첩 우희(虞姬)를 바라보고 ` 힘은 산을 뽑고(力拔山) 기는 세상을 덮었건만(氣蓋世), 불운하여 추(애마)마저 움직이지 않는구나. 추가 움직이지 않으니 어찌할거나. 희(애첩)야 희야 너를 장차 어찌할거나`라는 노래를 부를 때 장수들은 오열했고, 우희는 항우의 칼을 뽑아 자결하고 말았다."   항우는 키가 8척에 힘이 세고 장수 풍모를 지녔으며 재기가 뛰어나고 군사적 전략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초한군이 관무에서 대치하였을 때, 항우의 장사 3명을 쏘아 죽인 유방의 사수 누번이 항우를 겨누자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었더니 그 레이저 눈빛에 기가 질려 황급히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항우는 고집이 세고 포용력이 부족하여 본시 자기 휘하에 있던 한신·장량 같은 용사와 전략가를 떠나게 하고, 참모인 범증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적에 매수된 당숙 항백의 술수에 넘어가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등 우를 범했다.   나는 2013년 3월 12일 본지 `三懼·五阻`란 칼럼에서, "공자의 明王三懼와 영척의 五阻를 명심하면, 당태종의 貞觀之治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며 "5년 후 환하게 웃는 얼굴로 국민의 따뜻한 박수를 받으며 청와대를 나서는 성공한 대통령의 모습을 그려본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쓸쓸한 모습으로 청와대를 떠나는 그를 바라보니 항우가 자꾸 오버랩된다. 고집을 버리고 원로들의 권유를 받아들였어도, 유승민만 포용했어도, 각료들을 자주 대면해서 소통이 되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을.   그러나 만회할 시간은 충분하다. 미국 닉슨 대통령의 정치참모요 워터게이트 설계의 주역이었던 찰스 콜슨은 코우 목사의 전도로 새사람이 되었다. 변호사의 조언을 거부하고 유죄를 자인하여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앨라배마 연방교도소에 갇혀 있는 동안 참회와 겸손으로 변해갔다. 1975년 7월 가석방이 되어 감옥에서 결심한 대로 교도소 선교회를 설립해서 1993년 종교계의 노벨상인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모든 억울함 원한 다 털어버리고 군자표변(君子豹變)하여 찰스 콜슨처럼 언젠가 다른 일로 청와대를 다시 찾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2017.3.12.)
최종편집:2024-05-21 오후 01: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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