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본보에 `호와 작명 이야기`를 기고한 일이 있다. 조선시대로 시작하여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인·문인·화가 등 저명인사들의 호를 여기저기서 얻은 자료에서 적어본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는 YS·DJ·JP라는 이른바 영문이 호가 되는 3김 시대도 있었고 이후는 MB도 있었다. 작호 문화의 한 변천사이기도 했다. 대강 70여 명의 호와 작명의 유래를 써놓고 보니 명색이 글을 쓴다는 나도 호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은 아무도 불러주진 않았지만 정작 내게도 나 혼자 지어 놓은 호는 있었다. 중국 황하는 만 번을 굽어 흘러도 필경엔 동쪽으로 흐른다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성어를 내 선조 문집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절이 호가 됨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명함에도 `만절`을 넣어 찍었다. 만절필동! 이 얼마나 작호의 절묘함인가. 나에게는 이보다 더 그럴듯한 변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내 언젠가 명사가 되면 불러 주겠지라는 참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중앙 일간지에 `땅의 역사`라는 기획 여행기사가 났다. 거기 만절필동이 나왔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경기도 가평군의 옛 이름은 조종현이다. 그 옆을 흐르는 시내가 조종천인데 조종(朝宗)은 황제를 배알한다는 뜻도 있어서 조선이 망할 때까지 많은 유림들이 궁벽한 가평을 찾아 바위산에 제사를 지냈는데 거기 `만절필동 재조번방(再造藩邦·황하가 일만 번을 굽이쳐도 동쪽으로 흐르니, 명나라가 도와줘서 우리나라를 되찾았네.)"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순간 만절필동에 시선이 멈춰 웃음부터 나왔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였으며 우리 조선은 친명과 배명의 두 세력이 대립해 정책의 혼선을 빚고 있었다. 즉 명과 청의 교체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친명 세력은 명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며 국가 제도를 명에 따랐다. 친명·배청의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그 후 명이 사라지고 청이 조선에 화친을 요청했으나 거부했다고 기사는 쓰고 있었다. 또 임진왜란에 조선을 도운 명나라의 황제 의종·명종 두 왕의 사당을 충북 충주 화양동에 우암 송시열의 유훈으로 그 제자들이 세웠는데 그 이름이 만동묘이다. 이것도 만절필동에서 따왔다 한다. 이를 보는 순간 이른바 중국이 우리에게는 종주국이었다는 중화사상이 떠올라 지금까지 그 신문기사를 읽으며 인용을 해온 것이 무색해져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역사는 역사인 것을 어쩌랴. 먼 훗날 내 호를 그 바위 각자에서 따 왔다고 하든 말든 분명한 것은 과분하게도 내가 얼떨결에 유명인이 되는 기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 유쾌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쁠 것도 없었다. 더구나 조종천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계곡에는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이름을 새긴 바위가 있고, 을사늑약 파기를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한 조병세와 단식 끝에 순국한 최익현 이 3충신을 현등사 입구 삼충단에 모셔져 있으니 덩달아 나도 그 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동일시 했다는 말이다. 가당찮게도 순간착시를 일으키고 만 것이다. 내 언젠가는 가평 그 바위산에 가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너스레를 떤다면 그게 바로 치기(稚氣)가 되는 것이겠지? 그러나 내 이름이 잘 지어졌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그 이름 덕분에 `필동`이라는 글자가 가평 바위산에 각자가 돼 있으며 여기저기 `ㅇㅇ필동`을 사자성어로 인용하고 있으니 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필통으로 놀림을 받기도 해서 어린 마음에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오히려 더욱 고마워해야 할 일은 아닌가 하고 나 혼자 속으로 웃고 말았다.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 사람은 사후 이름을 남기려는 것은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때로는 그 알량한 이름 석 자를 남기려는 군상들을 보기도 한다. 이럴 때면 인생살이 덧없는데 허허롭기만 하다. 누구 말대로 `모든 것이 허업이구나!`가 그리 허황된 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생사 공수래공수거이니 말이다.
최종편집:2024-05-17 오후 04: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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