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적 교양을 충분히 몸에 지니고, 프랑스 왕비, 그리고 스코틀랜드 여왕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렸던 일세의 미녀가 하필 단두대에서 제 목숨을 잃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와 프랑스 귀족 마리 드 기즈 사이에 태어나 7일 만에 부왕이 죽어 요람 속에서부터 이미 여왕이었다. 메리의 조모는 영국왕가 튜터 가 출신으로 영국 왕위 계승권도 가지고 있었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왕태자 에드워드와 메리를 약혼시켜 영국(당시는 잉글랜드)과 스코틀랜드 양국을 하나로 통일하려고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친불 세력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메리는 프랑스 왕태자 프랑수아와 맺어졌다. 메리를 얻는 데 실패한 헨리 8세의 2대 뒤에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사이에 태어난 딸 엘리자베스가 영국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헨리와 앤과의 결혼은 로마 교황이 인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로마 카톨릭 입장에서는 서자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내외 영국의 로마 카톨릭 세력은 엘리자베스보다 메리 쪽이 정통적인 영국 여왕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엘리자베스와 메리는 숙명적으로 대립적이었다. 프랑스 왕가와 인연이 맺어진 메리는 6세 때부터 스코틀랜드를 어머니 섭정정부에 맡기고 프랑스에서 자랐다. 희고 긴 얼굴에 금발 머리, 눈동자가 아름다운 메리는 음악, 댄스, 마술 등에 뛰어나고 수개국어를 몸에 익힌 처녀로 자랐다. 1558년 메리는 프랑수아와 결혼했는데 그 다음 해에 부왕 앙리 2세의 죽음으로 14세의 프랑수아가 왕위에 오르고 16세의 메리는 왕비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1560년 12월 프랑수아 2세가 짧은 치세 끝에 어이없이 죽게 되어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귀국했다. 이렇게 영국과 스코틀랜드에는 남편 없는 두 여왕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메리는 9세나 나이가 많은 엘리자베스를 언니라 부르고 서로 편지를 교환하며 애정과 성실을 약속했다. 1565년 메리는 사촌인 단리 백작 헨리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그는 모계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뒤를 이을 영국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낳았으나 의지도 성격도 허약하고 여성 관계가 깨끗하지 못해 메리는 그에게 인간적인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남성적이고 실행력이 풍부한 스코틀랜드 명문 출신 보스웰 백작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다. 1567년 1월 단리가 천연두에 걸려 에든버러 교외 어떤 저택에서 치료를 받던 중 저택 지하실에 장치한 화약이 폭파되어 죽고 말았다. 보스웰이 주모자로 비난을 받았으나 형식만의 수사로 끝나고 용의자는 검거되지 않았다. 1567년 5월 보스웰의 아내가 이혼당하자 메리는 그와 결혼했다. 에든버러 시민들은 "여왕은 살 가치조차 없는 조재"라고 노골적인 반감을 나타내고, 부인들은 특히 더했다. 로마 카톨릭 귀족들도 메리를 버렸다. 위험을 느낀 보스웰은 재빨리 에든버러를 탈출하여 국외로 도망가 덴마크에서 죽는다. 메리는 감금되고 아들 제임스에게 왕위가 계승된다. 에든버러 시민들은 외치고 있었다. "매춘부를 태워 죽여라!" 새 국왕 제임스 6세는 아직 어려서 메리의 배다른 오빠인 제임스 스튜어트 마리 백작이 섭정했다. 1568년 5월 메리는 매수된 시동의 안내로 스코틀랜드 탈출에 성공하여 조그마한 어선에 몸을 싣고 영국으로 망명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코틀랜드 섭정정부와 메리 사이에 서서 애매한 중재재판을 한 뒤 아직도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주장하는 메리를 구금하기로 했다. 그러나 여왕으로 대우받고 연금도 지급되었다. 세월이 흘러 젊었던 메리는 어느덧 44세가 되었다. 1586년 청년 귀족 바빈턴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자베스 암살 계획에 동의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메리 밑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통일되고 가톨릭 신앙이 회복될 것을 기대했던 반역자들은 가혹한 처형을 받고, 메리는 1587년 2월 8일 포더링헤이 성의 넓은 방에서 처형당했다. 집행관의 손목이 떨리는 도끼의 둔한 소리가 두세 번 들렸다. 사람들은 외쳤다. "영국 여왕 만세!" 메리가 사랑했던 개가 누구에게도 눈치채지 않게 주인 뒤를 좇아 달려와 몸뚱이뿐인 시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들끓는 시민들과는 달리 혼자 방안에 들어앉아 여왕이 된 자로서의 숙명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롤모델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한 엘리자베스 1세를 이야기했다. 세 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어머니가 처참하게 죽고, 왕이 되기 전에 오랜 고초를 겪었고, "잉글랜드와 결혼했다"며 독신으로 살았던 점에 감정이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엘리자베스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왕관을 쓰고 태어나 그걸 자기 머리카락처럼 느끼는 메리 여왕과 더 닮았다. 하지만 메리 여왕 같이는 되지 말라. `대한민국과의 결혼`의 길은 달리 얼마든지 있다. 아 참, 청와대 진돗개는 삼성동으로 놓아주라. 개에게 무슨 죄가 있나? (2017. 3. 21)
최종편집:2024-05-21 오전 11: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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