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때로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특히 감수성이 민감한 청소년 시절에는 조금만 견디기 힘든 번민에 봉착해도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자기 생활환경이 고달프고, 고독을 느끼고, 그리고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시련에 직면하면 누구나 자살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다니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성적이 부진하여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에도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런 일로 접을 만큼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는 왜 태어났는지를 잘 모를 수 있다. 우리가 부모를 또는 태어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우리 생명의 소중함을 일컬어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부모를 통해 주신 이 생명은 스스로 버릴 수도, 버려서도 안 되는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생명은 우리가 모두 경외해야 할 천하와도 바꿀 수 없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전에 우리가 지금보다 더 가난하고 어렵게 살 때도 자살률이 낮았는데, 왜 세상이 이렇게 좋아졌는데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34개 국가 중 1위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의 생명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도록 유혹하는 것인지 걱정이 태산 같다.
가족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바야흐로 핵가족 시대가 되면서 집에는 자기와 부모 세 사람만이 삶을 꾸려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먹고 사는 일에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는 부모와는 얼굴조차 잘 마주칠 수 없는데 하물며 자녀들의 고민을 듣고 그것을 해결해 주어야 할 가족 간의 대화가 절대 부족한 현실에서 그 자녀는 인터넷이나 게임에 빠지기 쉽다. 자칫 못된 사연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지게 되면 청소년은 약간의 충동에도 목숨을 버리는 일에 이르고 만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어렵고 힘들 때 가장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가족임을 깨닫기 바란다. 조금의 성격 차이로도 쉽게 헤어지고 마는 현대 부부의 이혼문제,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가족 관계의 파탄, 이런 일과 청소년들의 자살과는 아무런 함수관계가 없을까? 거듭 말하거니와 가족은 사랑과 행복의 보금자리인데 하루 속히 이 가족 관계가 예전처럼 복원되어 자라나고 있는 자녀들을 보듬어 안아 주어야 한다.
학교, 종교단체, 직장과 사회도 그 구성원들을 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 무조건 청소년들의 잘못을 질타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수를 이해하고 토닥여 주어야 한다. 우리가 이 파란만장의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면서 웃는 자들과 함께 웃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줄 아는 여유롭고 성숙한 시민의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어른들이나 노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사는 일을 포기하고자 할 때는 그만한 고민과 번뇌가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분들을 찾아가서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의 정도 베풀면서, 다시 한 번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그 고민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면 어떨까? 정부 당국에서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가운데는 심각한 경제난과 헤어나기 어려운 고독문제가 있음을 헤아려야 한다. 자살 방지를 위한 당국의 입체적이고 적극적인 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때라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사람들은 한 번 더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도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기 바란다. 우리의 생명은 학교에서의 왕따나 성적 부진보다 무겁고 소중할 뿐만 아니라 생활고나 삶의 무료함 같은 것보다 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꿈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결코 자살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사람과 가정과 사회의 꼭지에 올라가서 만인의 마음을 녹여주는 우리의 사상이오, 철학인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면 이혼율도 줄고 자살률도 크게 줄 것으로 확신한다. 그런 날이 속히 우리 곁으로 다가오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