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회 법산 마을의 유래 ■ 2회 오암서원 창건과 중건의 경시록 □ 3회 한강 정구 문하 입문 □ 4회 입향조 죽헌 최항경의 생애 □ 5회 죽헌의 문집 및 시문, 유묵 □ 6회 장남 최은과 차남 최린의 약전 □ 7회 법산세고 편찬 □ 8회 영천최씨 역사인물과 현대인물 성주군에는 월항면 한개마을과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는 최씨 집성촌 법산마을이 있다. 하지만 법산최씨 집성촌은 지역에서 조금 떨어져 고령군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월항 한개마을과는 달리 사료와 집중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한강 정구의 제실인 회연서원은 성주의 문화유적지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약 5km 떨어져 있는 오암서원은 법산최씨의 시조가 세운 서원으로 많은 인재들이 발굴됐으나 문화유적지로는 소외돼 있어 최씨 후손들에 의해 문집 등이 발행되는 정도이다. 이에 법산마을과 오암서원에 대한 탐구와 함께 죽헌 최항경의 생애와 사상을 심층취재함으로써 문화성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며 지역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대내외에 알리고, 군민들에게 뿌리의 중요성과 애향심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훼철, 복원을 거쳐 136년 만에 종인과 유림의 염원으로 복원 오암서원은 죽헌 최항경 선생을 정위로 하고 그 아들 관봉과 매와 두 형제를 배위로 해 향사하는 곳이다. 죽헌의 관향은 영천이나 성주에 입향해 이름난 문벌로 떨치게 되었는데, 일찍이 서울 근교에서 태어나 선영이 있는 법산 마을로 옮겨왔다. 당시 한강 정구의 문하에 훌륭한 제자가 많았으나 그 중 죽헌은 뛰어난 제자로 인정받았다. 죽헌은 타고난 성품이 총민해 온순하고 인정이 많아 남을 가르치고 법도를 지키며 남을 대하는 것도 예를 중시해 영남에서 존경 받는 선비가 됐다. 영조6년(1730) 죽헌이 돌아가신지 90여년 만에 유림에서 처음으로 운암서원을 세웠다. 운암은 지명이다. 11년 후 영조17년 신유년(1741)에 서원훼철령이 내려 200여개소의 서원이 훼철될 때 운암서원도 훼철당해 자손들의 슬픔과 유림의 탄식을 자아내게 했다. 유림의 공론이 들끓어 훼철 41년 후인 정조6년 임인년(1782)에 다시 오암반석 죽헌정사의 자리에 지명을 따라 오암서원을 세웠다. 이때 관봉·매와 두 아들도 함께 배향했다. 이후 매년 춘추로 향례를 올리며 후학에게 학문을 익히고 닦는 장소가 됐고, 또한 후학들의 우의를 돈독히 하며 죽헌의 음덕은 널리 뻗어나갔다. 그러나 고종8년(1871) 다시 서원 훼철령의 발동으로 숭덕재사만 남기고 모두 철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114년이 지난 1985년, 다시 종인들의 뜻을 모아 故 정곤 주손의 주도로 대강당과 광영루 그리고 담장과 제사용구를 예로 갖춤으로써 서원의 면모를 되찾게 됐다. 1999년에 이르러 서원복원이라는 종인의 뜻을 모아 종회 결의로 서원복원 사업을 시작했다. 아울러 숭조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1999년 문중 유지들의 뜻을 모아 오암학계를 조직하고 조상의 학덕을 배우며 사적지 답사 등을 통해 젊은 종친들이 조상에 대한 존경과 음덕을 느끼도록 했다. 오암서원 복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헌·성금 모금 목표액 1억5천만원을 각 호당 30만원 이상 모금하기로 하고 그 명단을 석비와 경시록에 남기기로 했다. 특별 분담사업으로 사우각 신축은 사업가로 성공한 故 창곤 회장이 건조키로 하고, 시설개축 보수 등을 위한 국고보조 등은 前 서울시교육감 최열곤 종회장이 맡고, 문집번역 간행은 달곤 영진대학장이 주관하기로 합의했다. 일반 헌·성금 모금은 IMF 여파로 도시, 농촌을 막론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매우 부진해 6년의 세월동안 끈질긴 노력을 했음에도 겨우 목표액 절반에 불과했다. 그동안 선조를 위한 헌·성금 모금운동에 참여한 종인들은 오암서원 마당에 비석를 세워 이름을 영원히 기록에 남겨 서원 유지와 선조의 학덕을 기리고자 했다. 그후 특별 분담사업의 추진은 창곤 회장이 1억3천여만원으로 사우각 즉 효덕사와 문장 및 죽헌유허비 돌계단을 신축했고, 나아가 마을 안에 효부각을 신축하고 효행상을 제정해 죽헌의 효 사상 앙양과 마을의 면모를 일신하는데 기여했다. 열곤 회장은 대강당 및 숭덕재사와 부속건물, 석축담장, 조경 등 다섯 차례에 걸쳐 5억여원의 지방비 지원을 받아 획기적으로 보수를 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2002년 대홍수로 강정 종토 답과 제방, 법산교 유실을 복구하는데 모든 종인과 합심해 50여억원의 보조금을 획득해 완전 복구해 서원이 주관하기로 한 죽헌 관봉문집 번역과 학술발표회는 3천여만원을 출연해 가을까지 마칠 계획을 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성주문화원이 성주역사인물을 현창하고자 2016년 9월 국역으로 죽헌과 그의 두 아들 관봉·매와 3부자의 문집과 자료들을 수집해 법산세고를 발간하게 돼 종인들의 기쁨이 컸다. 오암서원이 들어선 자리는 죽헌이 은거해 살던 땅이고, 이곳이 무흘구곡 아래 있고 백척의 오암 위에 있어 흰돌과 냇물이 잇닿아 있으며, 봉황이 나는 듯한 바위라 죽헌이 이곳을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 오암정상량문 문서 최근 발견 120년 전 11대손 최성해 친서 최근 의성김씨 사우당 종택(수륜면 수륜리 윤동마을 소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82호) 김기대 종손(前 경북도의원)이 소장하고 있는 오암정상량문이 발견돼 영천최씨 법산문중에서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오암정상량문은 지금부터 120년 전 정유년(1897) 봄에 의금부도사금의 이종기가 편찬하고, 11대손 최성해가 쓴 귀중한 자료다. 오암정상량문은 오암서원 훼철 16년 후 서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어서 `오암정` 건립 시 쓴 상량문으로 추정할 뿐이며, 그후 오암서원 건립을 위해 오암정을 철거하는 과정에 유출된 것은 아닌지 유추하고 있다. 그후 1985년 대강당, 광영루, 담장, 재구를 갖춰 서원의 면모를 되찾았고, 1999년 오암학계를 조직하고 서원복원 사업을 시작해 2007년 오늘날의 오암서원으로 면모를 갖추게 됐다. 취재3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습니다.
최종편집:2024-05-17 오후 04:49:36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유튜브페이스북포스트인스타제보
PDF 지면보기
오늘 주간 월간
출향인소식
제호 : 성주신문주소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3길 15 사업자등록번호 : 510-81-11658 등록(발행)일자 : 2002년 1월 4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성고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45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성고e-mail : sjnews1@naver.com
Tel : 054-933-5675 팩스 : 054-933-3161
Copyright 성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