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마에 입 언저리에 하얀 손등에 보드랍고 감미로운 봄날이 폴로렌스의 옛 그림에서 본 나긋한 매력이 감돌고 있습니다 언젠가 옛날에 살았던 당신 나긋나긋 가냘픈 5월의 모습 꽃으로 덮힌 봄의 여신으로 보티첼리가 그렸습니다 당신도 또한 인사 한 번에 젊은 단테의 넋을 앗아간 사람 그리고 절로, 당신의 발은 낙원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해야만 합니까 밤이 이미 깊었습니다 나를 괴롭히렵니까 아름다운 엘리자베트 내가 시로 쓰고 당신이 노래할 나의 사랑의 이야기는 오늘 저녁과 당신입니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운(韻)이 흩어집니다 머잖아 당신은 듣게 되리라 들어도 이해 못할 나의 노래를 문학을 좋아하고 특히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위의 시가 헤르만 헤세의 시 엘리자베트의 일부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한 달 전에 서울에 사는 최복금이가 어느 병원에서 간암으로 죽음 직전에 있으면서 나에게 건넨 시였다. 최복금은 나와 동갑이고 같은 고향 사람이며 그녀가 어릴 때 읍내 장터의 돼지국밥집의 딸이기도 하다. 그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아버지를 잃고 집이 가난해서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홀어머니가 하고 있는 돼지국밥집 일을 하다가 훗날 서울로 시집가서 그 곳에서 잘 살던 여인이다. 최복금과 나와 류민혁형 그리고 안영임을 연관해서 회상을 하노라면 감개가 깊은 사연이 있다. 뒤돌아 보면 60년이 지난 이야기였고 병원에서 나에게 복금이가 전해준 헤르만 헤세의 시가 적힌 종이쪽지도 오랜 세월이 흘러서 하얀 백지였던 것이 노랗게 변색이 되어 있지 않은가. 류민혁형과 나는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는 나보다 네 살 연상이고 일제때 초등학교를 졸업해서 그 당시는 대부분 그러했지만 가난해서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농사꾼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입학할 무렵 민혁형의 집 형편이 조금 좋아져서 우리 마을에서 이 십리 쯤 거리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나와 동급생이었다. 민혁형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키가 6척에 가깝고 체격이 균형이 잡혀 있었으며 어깨가 적당한 넓이로 떡 벌어졌으며 특히 그의 얼굴이 뛰어난 미남이었다. 그는 얼굴빛도 시골서 농사짓는 사람답지 않게 하얗고 이마가 넓고 콧대가 쪽 곧아서 누가보아도 뛰어나게 잘 생긴 남자라고 했다. 중국의 유명한 고전소설인 삼국지 중에 유비 수하에 마초라는 명장이 있었는데 마초의 풍채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가 황금 투구를 쓰고 백마를 타고 있는 모습은 천하의 일품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의 별명을 황금꽃마초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고장 사람들은 류민혁형을 황금꽃마초라고까지 했다. 나와 민혁형은 같은 학년 같은 반 학생이기는 했으나 그는 나보다 4년 연상이기에 그리고 초등학교 다닐 때는 나보다 4년 선배이기에 나는 그에게 형이라고 했고 존댓말을 했다. 그는 마음씨가 너그럽고 후덕해서 나와 같이 중학교에 통학할 때도 꼭 그의 자전거 뒤에 태워서 갔으며 장마 때 개천에 물이 많으면 나를 언제나 그의 한쪽 손에 잡고 한쪽 손으로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개천을 건너기도 했다. 그가 나에게 그만큼 잘 해주었던 것은 원래 그의 마음씨가 덕성이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공부를 내가 그보다 조금 더 잘해서 그는 나에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부를 배울 때가 있어서 그 보답으로 나를 도와주기도 했다. 어쨌던 그는 나에게 파격적인 보호자겸 충복같기도 했었다. 우리가 읍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집과 읍과의 거리가 삼십리나 되기 때문에 집에서 통학할 수가 없어서 우리는 읍에 있는 장터 근처의 농가집 방 하나를 세 얻어서 자취생활을 했다. 우리가 자취생활을 할 때도 힘든 일은 모두 민혁형이 다 했으며 때로는 나의 내복이며 수건까지도 다 빨아 주기도 했다. 그는 나를 꼭 친동생같이 사랑해 주고 귀여워해 주었다. 우리가 잘 때도 그는 나를 굵은 그의 팔로 내 머리를 감싸고 자곤 했다. 일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민혁형이다. 그는 머리는 뛰어나게 명석한 편은 아니어도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를 해서 반에서는 상위권에 들었다. 그의 외모와 풍채가 아름답기 때문에 많은 여학생들이 그에게 추파를 보내도 한눈팔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우리는 여름방학 때도 읍내에서 과외공부를 하기 위해서 자취생활을 했다. 우리가 자취방을 얻어 공부하던 그 집 뒤에는 우람한 기와집이 있었으며 그 집은 부잣집이었다. 그 집에는 대구에서 여고를 다니는 딸이 있었다. 그 여학생은 머리가 뛰어난 수재였다. 그 여학생이 다니는 여고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문여고였으며 그 여고에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했다면 요즘 서울대에 입학한 것만큼 사람들은 우러러 볼 정도였다. 그 당시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가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만 그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때였다.
최종편집:2025-06-17 오전 1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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