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학생은 얼굴도 미인이었다. 우리가 자취하던 집 근처에는 돼지국밥집이 있었는데 그 집 딸 최복금은 대구에서 여고 다닌다는 그 여학생과는 읍에 있는 초등학교의 동창생이었다. 그 여고생은 초등학교 때는 복금이와 절친한 사이여서 복금이가 가난하다고 차별하지 않고 무척 친하게 지냈다.
대구의 그 여고생이 공휴일 날 집에 오면 복금이와 반드시 어울려서 이야기하고 읍내 거리를 산책하기도 했다. 그 여고생이 집에 올 때는 복금은 밤에도 반드시 그 여고생 집에 가서 같이 잡담을 하고 같이 노래도 부르며 놀기도 했다. 그래서 나와 민혁형도 골목에서 그녀들과 가끔 만나고 가벼운 눈인사까지 할 정도였다.
민혁형은 복금이네 국밥집에 나를 데리고 가서 국밥 한 그릇을 사주기도 했다. 이럴 때면 복금은 우리들 국밥 그릇에 돼지 순대며 살코기를 그녀 엄마 모르게 파격적으로 많이 넣어 주기도 하고 국밥 한 그릇을 더 주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와 복금이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민혁형은 읍 변두리 냇가에 나와서 산책을 하던 중 뜻밖의 사실을 나에게 고백을 하는 게 아닌가. 우리가 자취생활을 하던 뒷집 딸, 대구에서 명문여고에 다니는 그 여학생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황금마초인 그에게 많은 여고생이 추파를 보냈지만 그들에게는 조금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는데 대구학교의 그 여고생을 본 후 첫눈에 반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 학생이 명문여고에 다니는 수재라 그런 것도 아니고 그 학생이 부자라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녀의 천사 같은 고운 마음씨에 끌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도 조건이겠지만…. 가난하고 천한 돼지국밥집 딸을 초등학교 동창생이라고 해서 조금도 무시하지 않고 대구서 그녀 집에 올 때마다 복금이를 찾고 복금이가 하고 있는 국밥가게 일까지 도와주는 것을 보고 감격했다는 것이다.
민혁형은 가난한 그의 부모가 고생하면서 그를 공부시키는 것을 생각하면 여자에게 곁눈질도 보내지 말고 공부를 해야겠지만 그 여고생에게 끌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그 여고생에게 큰마음 먹고 고백편지를 하나 쓰고 싶은데 문학에는 전혀 소질이 없어서 편지 한 장도 제대로 못쓰기에 고민이라며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한다면서 편지 한 장을 대필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민혁형이 어떤 사람인가. 나를 친형처럼 보호해주고 희생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그때 문학에 소질이 있어서 학교에서 백일장에도 장원한 적이 있고 특히 나는 시를 좋아해서 시 공부도 열심히 했기 때문에 도내 학생 시 짓기 대회에서 당선된 것을 민혁형은 알고 있었다.
나는 하늘같은 황금꽃마초 민혁형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 흔쾌히 승낙했으며 있는 지혜를 다 짜내서 소위 연애편지 한 장을 썼다. 그런데 나는 민혁형보다 필체가 못하다. 아니 나의 필체는 최악의 악필이다. 그러나 민혁형의 필체는 그의 잘 생긴 얼굴만큼 명필이 아닌가. 민혁형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민혁형에게 내가 만든 소위 연애편지를 민혁형의 글씨로 쓰라 했으며 그도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그가 다시 썼는데 황금꽃마초의 풍채답게 그의 글씨는 과연 명필이었다.
그런데 이 편지를 안영임에게 전하려니 최복금이가 가장 적임자였다. 내가 그 편지를 어느날 복금이에게 이야기했더니 복금은 흔쾌히 전하겠다고 했다. 어느 토요일 날 안영임이가 대구에서 왔을 때(그녀는 대구 삼촌집에서 학교에 다녔음) 복금이가 그 편지를 가지고 갔으나 영임은 읍에 있는 목욕탕에 가고 없었다. 그래서 복금은 영임이가 거처하는 방에 있는 책상에 두고 왔었다. 그러나 영임의 세탁할 옷을 갖고 나오려고 그 방에 들어갔던 영임의 어머니가 그 편지를 발견하고는 읽었던 것이다.
난리가 났다.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복금의 머리채를 영임의 어머니가 휘어잡고 혼을 내주는가 하면 또다시 그런 짓을 하면 복금이네가 세들고 있는 그 점포도 다른 사람에게 세놓겠다고 했다. 그 점포도 영임이네집 소유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목욕탕에서 집에 온 영임은 모든 것을 다 알았다. 영임도 황금꽃마초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엄마가 몇 조각으로 찢어버린 그 연애편지를 가까스로 다 읽고 난 영임은 그녀 엄마에게 소위 이실직고를 한 것이다. 영임은 민혁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것이었다. 영임은 마음속으로 민혁형을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영임의 민혁형을 향한 애모의 맘은 필사적이었다. 본인 영임이가 사생결단인데 호랑이 부모인들 어떻게 하랴. 둘은 만인이 우러러보고 칭송할 만한 선남선녀였고 진실한 한쌍의 배우자인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뒷날 민혁형은 대구의 최고 명문대학교를 졸업하더니 외국에 유학까지 다녀온 후 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영임은 의대를 나와서 의사가 되었다. 황금꽃마초는 대구사회에서도 미남교수로 그리고 덕망높은 학자로서 두 부부는 시종일관 사랑을 주고받고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나와 복금은 더 살아서 그녀는 서울서, 나는 대구에서 남매 이상의 우정을 교류하며 살던 중 그 최복금이가 불치의 말기 간암에 걸려서 내가 그녀의 임종을 지키게 될 줄이야. 그런데 뼈만 남은 복금이가 나에게 건네주는 편지 한 장은 분명히 내가 만들어 준 문장이며 민혁형이 자필로 쓴 60년전 그때의 그 편지가 아닌가. 그리고 말미에 적은 헤르만 헤세의 엘리자베트의 한 부분이었다. 그때 영임 엄마가 몇 조각으로 찢어버린 그 편지가 틀림없었다. 다만 60여 성상을 보낸 그 편지가 원래는 설백의 흰종이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니 노랗게 변색이 되었을 뿐이다.
나는 어떻게 된 사연이냐고 복금에게 물어보았다. 황금꽃마초 민혁형을 복금이가 영임 못지않게 짝사랑을 했다는게 아닌가. 그 편지를 영임에게 전하라고 내가 그녀에게 주었을 때 그녀는 그 편지를 갖고 읍사무소로 갔다고 했다. 복금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즉시 읍사무소 급사로 취직한 적이 있어서 그때 읍사무소 복사기를 조작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복금이가 나로부터 민혁형의 편지를 받은 즉시 읍사무소에 달려가서 그녀 손으로 무려 다섯장이나 복사를 했다는 것이다. 혹시나 분실될까해서 였단다.
복금이는 여윈 손으로 떨면서 내 손을 잡더니 "나는 황금꽃마초를 영임이 못지않게 짝사랑했지만 헤르만헤세의 시 엘리자베트를 좋아하는 너를 더 사랑했어! 나를 욕해도 좋아. 시를 좋아하고 시를 잘 짓는 너를 황금꽃마초보다 더 좋아했단다. 또 한 번 이야기할게. 나 욕해도 좋아. 그 대신 헤르만 헤세의 그 시 한 번만 낭송해줄 수 없겠니?" 나는 그녀를 와락 안고는 헤르만 헤세의 엘리자베트를 읊으며 울고 있는데 복금은 숨을 멈추는 게 아닌가. 그녀의 그때 얼굴은 지극히 평온하고 희열이 넘치는 듯했다. 나는 소리내어 울면서 내 몸이 민혁형보다 약하다고 하며 순대와 살코기를 파격적으로 더 주던 복금이 네 마음 이제 알겠구나. 죽지 마라 복금아 하고 어린아이처럼 병상이 떠나갈 듯 울었다.
불쌍한 최복금아, 천상에서 안영임 부부와 만나 헤르만 헤세의 시를 낭송하며 행복하게 살아라. 우리 넷 중 너마저 떠나고 나만 혼자 남았구나. 나를 왕자처럼 사랑했던 부모님, 누나 다섯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의 생애 중 제일 친숙했던 황금꽃마초, 영임 그리고 최복금까지 결별한 나로서는 극도의 신경쇠약의 늪에 침잠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늙은 내 아내가 곁에 와서 "여보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당신이 별명을 지어준 나 엘리자베트가 여기 있잖아요"하며 너무 슬퍼마라며 보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의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 나는 아내의 두 손을 힘주어 잡고 미친 듯이 헤르만 헤세의 시를 힘차게 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