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일러 혼밥족, 혼포족, 딩크족 등의 시대라 한다. 이로 인한 인구 감소, 1인가구 등 가족 구성의 변화, 특히 청년들의 취업 전쟁은 고시원의 `1인생활`을 부르면서 사회의 한 풍조가 됐다. 이는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오늘의 사회현상이 다양다원화로 나타나게 되어 한마디로 그 원인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내 소견이다.   오늘의 이 풍요로운 사회, 그 이면에는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을 맺으면서 그로 인한 반대급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 수준으로 말한다면 `먹을거리`만 해결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지난날의 농경사회에서 노동력 하나만으로 살아가다 불도저가 나와 삽질이 무의미해 지듯이, 이 사회에도 그만큼의 큰 변화와 변전이 왔고 지금도 이런 추세로 빠르게 가고 있다. 이 와중에 살아가는 방법도 변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래서 욜로족, 혼포족, 졸혼족 같은 풍조도 나오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런데, 사실은 내 집에도 두어 달 전 외국에 사는 애들 셋이 왔다 갔는데 그 중에 유감스럽게도 이런 `···족`이 있으니 이를 어쩌나?   어느 날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애들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특히 백일과 돌 사진, 그리고 그 즈음에 찍은 한 장의 앙증맞은 사진에 내가 빠지는 순간이었다. 반어법 `고놈`을 써가며 뉘집 앤줄 모르지만 참 잘 생겼다, 예쁘다, 요놈이 커서 뭣이 될까···? 순진에 무구까지 온갖 미사여구를 들이대도 아깝지 않던 한 애를 본 것이다. 또 다른 한 장에는 제 언니와 싸워 샐쭉, 눈 흘길 때의 그 귀염은 섣불리 뭐라 표현하는 것보다 그냥 `배꼽을···` 밖에 없었다. 어디 전시회에 출품해도 가작 정도는···?   그랬는데 금방 마음의 동요가 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지었던 미소가 어느새 무거운 음울로 변하고 마는 것이었다. 거기다 결혼, 까짓것 안 해도 산다며 떳떳이 속내를 털어놨다고 제 엄마가 내게 들려 준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애 초교 입학 전 네다섯 살이나 됐을 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더 아려온다. 그림책을 보면서 저 아는 것 뽐내듯이 할머니에게 `키스`를 따라 읽으라 했다. `츈향뎐`도 읽었던 할머니지만 영어발음은 제대로 할 수 없어 `키슈`라 하니, 아이고 할머니, 그것도 못하면서 장래 커서 뭐 될래···!라 소리쳤다. 이 호통(?)을 당한 할머니의 폭소는 거의 천둥 수준이었다. 그 폭소 두고두고 회자됐던 것은 물론이다.   그 애 초교 졸업 우등상 발표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최ㅇㅇ! 하니 애가 기대도 안한 호명에 놀라 뜨악했던 기억이 있다. 나도 제 엄마도 몰랐던 상이니 공부도 좀 하겠구나! 하고 순정한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랬던 앤데 4, 5년 전만 해도 `결혼해야지`라고 하면, `내 인생 내가 사는데 걱정 말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말은 그렇게 해도 때 되면 하겠지` 하며 내 속으론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그런데 이젠 `혼`자도 꺼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취업·결혼`이 금기어가 된지 오래이니까 말이다.   그게 음울을 넘어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었다. `포기···` 전만 해도 말은 그렇게 해도 딴은 무슨 계획이 있겠지···, 설마··· 했지만 (본인이 그랬을 지도 모를) 이젠 이리 되고 보니 그나마의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되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혼밥에다 혼포까지 나오는 오늘의 이 문명사회가 무색하여 시대 풍조로만 치부하기엔 그 대가가 너무 혹독하다 생각했다.   취업도 못하는데 웬 결혼···? 결혼은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주택, 육아는 또 어째야 하느냐. 모두 어려워 혼포가 나온다고 생각하니, 거기 내 애도 포함해야 한다니 정말 아찔하다.   내 한 지인은, 아들 하나가 아들딸 낳고 살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가출을 했다는 것이다. 평소 종교적 성향을 보였으니 물어물어 산사를 찾고 아들도 찾았다. 내가 그랬다. 제 좋아 입산수도하겠다는데 왜 그걸 막느냐고 했더니,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온갖 희로애락도 겪고 사람 사는 맛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희로애락 중엔 정염(情炎)이 빠지지 않았고, 부모가 생각하는 자식들의 삶의 선택은 `세속적 삶`이 전부라고 말하는 그에게 나도 솔직히 거기 편승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네 살 전후 천진스레 제 할머니 훈계(?)하던 총명아였는데, 초교 때 우등상도 받았는데 시운이 불리하여 시집도 가지 못하다니 그게 한없이 애연함으로 다가옴을 어쩌지 못한다.   나름으로 생활력은 있지만 망망대해, 거친 세파를 혼자서도 헤쳐 갈 강기는 좀 부족한, 여리디 여린 심성의 내 아이가 인생 고해를 함께 뚫고 갈 반려자도 없이 삶을 혼자 꾸려가야 할 것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외향적 `리더`이기보다는 전형적 내조형이니 더욱 그렇다.   모든 선남선녀가 혼밥족이 돼도 내 애 만큼은 제발 시집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은 있다. 아이러니지만 이건 분명 `이기주의적 발상`만은 결코 아니라는 데에 더 큰 고민이 있다. 다만 한 가지, 그대로라도 수년째 외국생활 하는 것으로 보아 내 걱정이 기우는 아니길 바랄 뿐이다.
최종편집:2024-05-21 오전 10: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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