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국경의 의미가 희미해져 가는 이른바 글로벌 시대인데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다. `어제가 옛날`인 급변하는 세태에 밀려 별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됐지만 방송·신문에서 `성주`가 나오면 뭔지 모를 자존감 같은 것이 생기고 어쩌면 이게 순수한 애향심이 아닌가 한다.   일전 TV방송 퀴즈 시간에,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주요 문서를 보관하는 4대사고(史庫·춘추관, 성주사고, 전주사고, 충주사고)를 출제하며 `성주사고`가 나왔다. 그것도 유서 있는 역사 얘기이니 더욱 마음이 갔다.   `사고` 얘기 하자니 10여 년 전 숭례문 방화사건과 중종33년(1538) 외사고인 성주사고의 화재가 떠올랐다. 성주사고 화재 원인은 숙직자들이 추위에 불을 피웠다가 옮아붙었다고 했지만, 조정에서는 다른 가능성을 의심했다. `수령을 해치고자 하는 자들이 일부러 방화하여 수령이 파직되길 바랐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역사유물이 멸실된 것만은 허허롭다.   우리 성주, 성주인이라면 `성주`라는 지명이 생성된 과정은 이미 다 아는 얘기지만 다시 고찰하는 것도 의미는 있으리라. 본래 6가야의 하나인 성산가야였다가 신라가 이를 정벌하여 처음으로 붙인 지명이 본피현이다.   이렇게 출발한 국명이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성산·신안·경산 등 9번의 국명이 있었고, 군세에 따라 부·목·주·군·현 등으로 부침을 거듭하다 오늘의 성주가 되었다.   군세의 부침이란, 조정에 공신이 나오면 도호부, 목, 주 등으로 격상하고 역신 등 불상사가 나면 최하위 현으로까지 강등시킨다는 말이다. 그래서 광해군 때 이창록은, 벼슬아치들의 부패상을 한탄하여 지은 노래(-차라리 내가 임금이 될까···)가 문제 되어 우리 성주가 현으로 떨어지기도 했고 그래서 고령현으로 편입되는 곡절도 겪었다. 반면에 조선 태종의 태를 용암면 조곡산에 안태를 했다고 목으로 복귀시키기도 했다 한다. 해방 전후일 때 대구 가려면 `태봉재`를 넘었다는 얘길 자주 들었다.   태실 얘기가 나왔으니 세종대왕자의 대군과 세손의 태실 19기가 안치된 것도 빼놓을 수가 없다. 왕자가 탄생하면 그 태를 태항에 담아 안치할 태실을 찾느라 전국에 지관을 보내 명당을 찾는다. 그래서 찾은 태실이니 이게 바로 우리 성주가 생·활·사의 복지임이 분명해졌다.   학교에서 배운 성산별곡 그 성산이 혹시 우리 옛 성산가야와 연관이 있지 않나 하고 자료를 찾았으나,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전남 담양 지곡리에 있는 성산이 배경이라 했다. 곧 아쉬워 송강가사 시가집을 찾았더니 거긴, 송강의 아들 홍명이 엮었다고 하는 것은 지금 전하지 않고, 송강의 5대손 관하가 성주목사로 부임한 다음 해에 간행한 `성주본`이 있다고 했다. 특히 그 성주본에는, 대가라는 명성에 맞게 사미인곡 등에다 그 유명한 장가인 장진주사를 포함 모두 5편이 있고, 단가 77편이 전해진다고 했다.   장가에 송강이라면 단가에는 고산 윤선도인데, 이 윤선도가 성주목사를 재임(1634~1635)했다고 조용헌 교수가 10여 년 전에 그의 에세이에 썼다. 다시 고산을 찾았더니,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주사(舟師·수군의 별칭)를 거느리고 강화도에 이르렀으나 이미 함락된 후···`라는 기록만 있었다. `주사`를 내 식견으로 고증할 수 없음이 대단히 유감이다.   또 고려시대 한림학사를 지낸 김황원이 성주가 경산府일 때 고을을 잘 다스려 치적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평양 부벽루에 올라 절경을 읊었는데 `장성일면용용수 대야동두점점산···`까지 짓곤 다음 시구를 부벽루 기둥을 붙잡고 장고를 했지만 끝내 잇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역사 깊은 우리 성주! 지금 이 정부는 국정 과제 중의 하나인 `가야사 조사·연구`에 상당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고 학계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시의를 맞춘 것인지 사적 86호로 지정된 성산동 고분군의 출토 유물 전시를 위한 홍보와 전시관 건립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본지 기사도 봤다. 또 다음 날 중앙지에는 이영훈 교수가 쓴 기고문에 나오는 고분군에는, 경북에는 경산·성주, 경남 김해·양산, 전남 나주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했으니 이럴 때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까? 더구나 성주 용산리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이라고 설명을 붙인 사진까지 실었으니 말이다.   우리 고대사의 원전은 정사인 삼국사기와 야사인 삼국유사이다. 이 삼국유사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가 차례로 건국되고 다음 가락국이 탄생했다고 적었다. 그 가락국이 10대(AD42~BC532) 490년간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했을 뿐 대가야는 없었다. 다만, 대가야는 역사사전 연표에만 AD42~BC562까지 16대까지 계속됐다며 세 왕 이름만 올라 있을 뿐이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 `김해`를 찾았더니 수로왕은 158년을 재위하고 훙(薨·왕의 죽음)했다는 기록이 있고 나머지 5가야도 명기돼 있었다. 그런데 왜 삼국유사에는 5가야가 없을까? 아마도 삼국유사는 동국여지승람에 비해 300여 년이나 앞선 기록이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내 판단이다. 우리 성산가야와 함께 5개 가야는 그 원전이 어딘지 대단히 궁금하다. 물론 내 과문이 그 탓이겠지만 말이다.   가볍게 `고향` 얘기하고 싶었는데 주제가 너무 버겁게(?) 되고 말았다. 끝이 없는 고향 얘기,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이만 적는다.
최종편집:2024-05-21 오후 01: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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