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 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내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 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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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어린 시절은 부족함으로 가득 채워졌던 시절이다. 먹을 것이 없어 꽁보리밥과 감
자 따위를 먹으며 자랐고, 도시락 반찬은 주로 콩장이었다. 겨울밤에는 먹을 것이 없어 무 구덩이에서 무를 꺼내와 깎아 먹었고, 밭 한 뙈기 없었던 우리에게 고구마는 귀한 간식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설 시대로 넘어간 옛날 이야기다. 아이들은 이런 걸 먹지 않는다. 농경시대가 서비스 시대로 바뀌면서 먹거리가 풍족해졌고 입맛은 상품에 길들여졌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이들과 그들의 미래가 불안하다. 홀로 서는 데 익숙하지 못한 우리 아이들 세대역시 슬픔을 겪으면서 스스로의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지만.....
이 시는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의 어린 시절의 노래다. 보편적인 가난, 호롱불 속에서
`주경야독`과 `형설의 공`을 쌓아 거기서 탈출해 보려고 발버둥치던 세대들의 아픔을 그리
움으로 승화시켜 놓은 시(詩)다.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문풍지를 뒤흔드는 바람소리를 듣던 소년은, 자라서 그 가난한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시인이 된 소년은, 미처 큰 울음 울기도 전에 벌써 `바람의 집`인 이 슬픈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그의 시는 우리의 가슴을 울리며 이렇게 펄펄 살아 있다니......!
(배창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