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명족)의 고장 우리 성주에도 의기(義妓)가 있었음을 한참 전 본지에 실은 일이 있다. 그 의기의 이름은 염앵무인데 별칭 염농산이었다. 농산은 앵무새가 많이 산다는 전설의 산 이름이니 이를 따서 염농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의기라 하면 진주 논개만 알지 염앵무는 아무도 모르는 듯해 내 과문(寡聞)함을 탓하기만 했었다.   일전 KBS TV에, 국체보상 운동이 일어났을 때 당시 국사편찬위원회가 제작한 문서가 나왔다. 거기 혹시나 우리 염앵무가 나올까 하고 가슴을 졸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역사적 그 운동 시발은 대구였으며 이를 본 전국 각지에서 호응하였으며 특히 평양에서 안중근 부부도 동참했다는 것만 나왔다.   다음은 2017년 현 국체보상기념사업회 명예 회장인 김영호 씨가 중앙 일간지에 실은 기고문의 발췌이다.   국체보상운동은 발상지인 대구에서 당시 거상(巨商) 서상돈이 낸 100원의 거금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김영호 회장이 서두를 열었다.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이때 당시 앵무라는 기생이 `이 운동은 전 국민의 의무`라며 100원을 쾌척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기사를, 1907년 대한매일신보가 이를 기사화 했다고도 썼다. 이로써 앵무 기생을 대구 거상 서상돈과 같은 반열에 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앵무는 한문·시·가무에 능했던 관기였으며 한때 달성 권번(일제 때의 기생조합)의 초대 회장을 지냈다. 신분에 비해 거금을 투척했으니 한때 앵무, 서화가 서병오, 달성공원을 `대구삼절`로 불리기도 했다니 가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어느 날 성주군 용암면 한 농민이 `우리집 옆에 앵무비가 있다`는 제보로 세상에 알려졌다. 비석 옆면에 `염농산제인공덕비`라 새겨져 있었고 축대에 향로집도 있었다 한다.   이 비각을 `앵무빗집`이라 부르고 비석을 세운 때는 기미 5월5일이라 했다. `성주군지`에 의하면 앵무의 출생은 1889년, 사망은 1946년으로 확인됐다고 했고, 국체보상운동 때 100원을 기부한 것도 18세 때의 일이라니 더욱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썼다. 신분도 그렇지만 그 나이에 이른바 그 국가관이 모든 이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의 행적은 또 있다. 용암면 들판은 홍수나 가뭄에 피해가 막심했으니 이를 본 앵무는 거액을 들여 제방을 쌓고 수원지(水源池) 개울을 구축했다. 오늘에서 말하는 `수자원개발`이라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제방 이름이 두리방천이었는데, 그 제방이 완공된 날 앵무는 학춤을 추었다. 그 연유로 그 들판을 `앵무들`이라 불렀고 앵무빗돌을 세웠으며, 양반골 성주에서 고을 원님보다 앵무를 더 칭송했다 한다.   앵무는 판소리 보급에도 앞장 서 대구가 판소리의 중심이 되었다. 명창 박녹주도 이 무렵 앵무에게서 판소리를 사사했다는 데서 그의 위상을 더욱 높이게 되는 게기가 됐다는 것이다.   평소 후배 기생들에게 `기생은 돈 많은 사람만 섬겨서는 안 된다.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 친일파 경상 관찰사인 박중양이 유서 깊은 대구읍성과 객사 태평관을 없애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농성운동도 벌였다. 또 독립만세를 외쳤던 기생조합 사건도 있어서 그 배후로 앵무가 지목됐다고도 하고, 상해 입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비밀창구 역할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1930년대의 대구 명문 사학 교남학교(현 대륜고등학교)가 재정난에 빠졌을 때 앵무는 가진 재산의 반인 거금 2만원을 쾌척하여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이다. 당시 신문은, 염농산과 김울산 두 여사가 교육 사업에 몸을 던져 장부가 못한 일을 결행함으로써 수전노들의 심장을 자극했 다고 썼다.   광복 다음 해, 앵무들 한 연못에 학 한 마리가 춤추듯 물속에 내렸다가 하는로 사라졌다. 앵무가 제방을 중수해 놓고 학춤을 췄던 연못이었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가보니 앵무가 흰옷을 입고 물에 빠져 있더라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인근 야산에 장례를 치러 주었으니 그 무덤을 그 지역 연로한 분들은 앵무묘로 기억하고 있다. 무슨 신화처럼 그렇게 앵무는 `짧으나 굵은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김명호 명예이사장 기고문 말미에는, "20세기 전반 역사의 암흑기를 때로는 논개 같고, 때로는 제주도의 만덕 같은 모습으로 살다 간 그녀(앵무)로부터 영롱한 빛을 그렇게 많이 받고도 우리 근현대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라는 자탄도 있었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향한 일갈(一喝)일 수도 있으며 보다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어쩌면 향토사를 모르는 나를 향한 정곡의 질책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긴긴 여정에 선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의기도 명기도 함께 역사를 열어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었다. 근현대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중에 우리 성주 출신 의기 앵무의 행적을 되새김에 더 큰 뜻을 두어야겠다. 한마디 더하면, 우국충정의 표상 논개와 같은 반열에 놓고 인지 받고 싶음을 감출 길이 없다.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6: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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