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재난지원금을 두고 `기획재정부(곳간지기)` 부총리와 `나라살림`을 총괄하는 총리가 정책 방향을 두고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다.
곳간은 생각 않고 좀 많이 쓰자고 총리가 말하니, 부총리는 나라 재정이 `화수분`이냐고 대응했고, 총리는 그럼 `기재부가 니꺼냐`라고 응수했다. 온 나라가 코로나19로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일반 국민은 좀체 볼 수 없었던 모양새였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담긴 쌀(재물)을 자꾸 써도 쓰는 만큼 또 채워진다`는 `화수분`이었다.
얘기는 60년대로 돌아간다. 경기 여주에서 고아로 자란 어떤 처녀가 남의 집 식모(지금은 가사도우미지만 그땐 그렇게 불렀다.)로 결혼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그걸 본 누군가가 나이도 든 떠꺼머리총각과 결혼을 시켰다.
그런데 아이 하나 놓고는 머슴살이도 팽개친 남편은 종적을 감췄다. 살 길이 막막해진 그 여자는 돌잡이 아이를 업고 방향도 모르면서 무작정 서울을 간다고 나섰다. 산업화가 막 시작될 때이니 너도나도 상경길에 오를 때였다. 걸식도 하고 요샛말로 노숙도 하며 도착한 곳이 지금의 청량리역이었다.
지금은 대도시가 돼버렸지만 당시 청량리 근방 인가(人家)는 기차역 있는 데만 드문드문 있었고, 그 여자가 처음 발 디딘 곳은 버드나무가 듬성듬성 있는 모래밭이었다. 때는 봄이라 버드나무 밑에 자리 깔아 아이와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 그 훨씬 뒤에 지인으로부터 들은 모래밭 얘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모래밭을 일구어 움막을 짓고 채소도 심었으며 낮엔 말 수레를 끌어 품값을 벌고 밤에는 말을 버드나무에 메어 놓고 살았는데, 그 모래밭이 개발이 되며 자기가 썼던 만큼 소유주로 등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것이다. 서울이 산업화 이후 개발이 되며 흔히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무작정 상경한 그녀가 자리 잡은 곳이 동대문 시장 근처 식당이었으며 거기서 숙식 제공 받으며 드디어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서너 살이나 된 그 아이는 출생신고도 안 했으니 이름도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본 인근 한 남자가 출생신고를 해 주겠다며 엄마는 아이를 업고 그와 함께 동사무소로 갔다. 주소와 아이 이름 물으니 그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다가, 머리까지 치켜들며 노래하듯 `요놈! 우리 아이 화수분인데, 화수분인데···` 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동 직원이 `이름은 화수라 하면 되겠고, 그럼 성은?` 하니 같이 갔던 남자가 `내 성이 林씨이니 내 성을 따서 하라` 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임화수`가 된 것이다.
그 후 열댓 살이 되도록 시장에서 이일 저일 허드렛일을 했는데, 어찌어찌 하다가 명동에 있는 평화극장에서 역시 숙식을 제공 받으며 청소부로 취직을 했다. 동료가 둘인가가 있었는데 힘이 좀 세었던지 임화수가 리더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그에게는 `주먹세계`가 열리게 됐던 모양이다.
어느 날 다른 아이들은 열심히 일 하는데, 임화수는 놀고만 있다가 평소 사장 출근 시간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 그 시간이 되면 빗자루 들고 정신없이 일하는 척했다. 이를 본 사장이 임화수를 신임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관리인이 됐다가 드디어 극장 사장자리까지 꿰차는 처세술을 보였으니, 그가 바로 일세를 풍미(?)했던 주먹왕 임화수였다.
당시 부패한 자유당 정권에 능란한 권모술수로 경무대(현 청와대) 실세 곽영주를 등에 업고 기호지세(騎虎之勢)로 영화산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다 아는 대로 명배우 최무룡이 그에게 행패를 당했으며 특히 희극배우 김희갑이 임화수의 폭행으로 갈비뼈가 부러진 사건도 그때 있었다. 4·19를 부른 부패한 권력인 자유당이 몰락하자 그의 `주먹 인생`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내가 60년대 초 전방 고지 초소에서 군 생활할 때 당시 한국일보가 우리나라 처음으로 주간신문을 발행했는데, 거기 임화수의 일대기 중 출생부터 청년시절 얘기가 실렸다. 나는 그때 하사로 조장이었으니 대체로 한가한 시간이 많아 흥미진진하게, 읽고 또 읽고 했으니 기억은 지금까지도 또렷이 남아 있다. 그게 바로 `화수분`의 주인공이었다.
5·16 이후 법정에서 재판 받는 사진만 사상계 잡지에서 봤는데, 그의 재판장을 향한 부라린 눈은 양손은 결박이 돼 있었지만 금방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 같은 자세였다. 그 장면만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해진다. 그 책은 상경하며 이사도 하고 유랑(?)하는 중 어찌어찌하다 유실됐으니 그때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나 개인사로 보면 좀 애석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화수분`이라는 말을 임화수 엄마는 어디서 어떻게 들어 아는지 모르겠다. 식견의 문제가 아니라 대체로 잘 쓰지 않는, 사용 빈도가 낮은 말을 아이한테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부잣집 식모살이 하는 동안 주인집 어른들이 하는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 알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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