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36년간의 왜정(倭政)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생활양상과 오늘의 성주사회환경을 고찰(考察)하여 일부(一部)를 기록코자한다. 지난 60년전의 을유년을 회상하여 보면 잊을 수 없는 일본(日本)국으로부터 해방된 해이다 그 당시 본인 연령은 14세 였다. 그때의 우리나라 사회상을 회상해 보면 우리들의 조상들은 악몽의 왜정 36년동안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전국 방방곳곳에서 전개하다가 희생도 수없이 많이 당하였다. 또한 일로(日露)전쟁의 승리의 여파로 일본국은 대동아 전쟁을 야기하여 4년간을 지속하면서 중년 남자는 보국대(탄광인부)로 청년은 징병으로 처녀는 위안부로 끌려갔으며, 식량은 군량미 명목으로 공출로 빼앗아 갖고 우리 국민의 생활현상은 4년간의 지루한 전쟁과 매년 연속적 한발로 식생활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을 하고 가장 어려운 시기가 감꽃 떨어지고 보리 필 때였다. 이것은 속칭 보릿고개라고 한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60년전 을유년 8월 15일 일본국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은 되었으나 미.소(美.蘇)양국의 협약으로 한만은 38선의 분단국가로 남한에는 자주민주주의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각 당을 조직하여 자유당의 수반인 이승만 대통령의 영도 하에 정부를 수립하고 국가 민족을 위하여 정치를 하였으나 사회상은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속칭(사바. 사바)라는 불신풍조가 통용되기도 하였다. 이 당시 본인은 경대 재학중에 이효상(전국회의장)선생님의 강의에서 현 사회상을 비유한 말씀 중 하나만 기록하면 큰 저수지가 있는 대 이 저수지 내부에는 혼탁한 물이 가득 차 있다. 이 물을 우리국민의 식수로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시면서 답은 저수지 내에서 많은 생수가 나와서 혼탁한 물은 전부 흘려 나가게 하고 맑고 깨끗한 물로 바뀌어져야 된다는 격언까지 하시었다. (이 말의 뜻은 위정자와 공직자들이 사욕 없는 청렴한 마음으로 바뀌어 저야 된다는 뜻이다) 학생여러분은 생수가 되어 달라는 교훈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의 부정부패만 날로 더해가고 있을 때 3월 15일 부정선거로 인하여 전국 대학생들이 의거 데모로 자유당 정부가 무너지고 그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등장하여 집권은 하였으나 집권 초기부터 당 내부에 신파(장면)구파(윤보선)로 권력다툼만 일삼고 국민은 민주당 정부를 불신하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께서 혁명을 일으키니 전 국민은 올 때가 왔다고 하였다, 그 후 박대통령께서 집권 18년동안 가난을 후손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구호 아래 새마을정신을 제창하여 경제부흥으로 국가 발전과 국민의 문화생활과 살기 좋은 나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때에 필자는 학교를 마친후 서울의 재벌(최복선, 김두종)3인이 공동명의로 고령토 규석 광산을 12년간 대일 수출을 경영하면서 인생에 대한 철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 후 고향인 성주군대가농협을 창설하여 12년간 조합장으로 연속 근무하다가 성주농지개량조합장으로 전임하였을 때 우리성주의 자연환경은 예고 없이 닥치는 홍수와 가뭄은 농사를 망쳤다 이러한 현황 속에서 농민들의 절실한 소원은 한발에 대비한 수리시설의 설치였다. 그러나 아무런 대처방안을 가지지 못한 농민들은 홍수나 한발을 당할 때마다 한숨을 쉬며 애꿎은 하늘만 원망할 따름이 였다 누가 이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을 것인가? 누구의 힘을 빌어 무슨 돈으로 어떤 시설을 해야 이 농민 한을 풀어 줄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가 어떻게든 이 일을 해야하겠지만 어디에서 그 방법과 길을 찾아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천우신조라할까? 우연의 행운이라 할까? 이러한 난제를 해결할 대역사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또 아무런 힘도 지혜도 가지지 못한 필자에게 뜻밖에도 이 엄청난 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또 수행해야 할 기회가 부여되었다 그것은 필자에게는 분에 넘치는 행운이요 엄청난 영광 이였지만 동시에 너무도 험하고 고된 고난의 길이였다. 성주농지개량조합장으로 전임하게 되어 이것이 성주댐 건설의 과제를 본인에게 안겨준 계기가 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본인의 숙명 이였을는지 조합장에 취임한 몇일 후 본인은 인사차 경상북도 농업진흥공사 김태규 지사장을 만났더니 김 지사장의 첫말이 성주조합장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농진 에서 10년전에 성주댐과 하사댐의 두 곳을 후보지 조사를 한 결과 자연조건이 (현 성주댐위치)아주 좋은데도 아무도 댐을 만들려고 추진하는 사람이 없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데 정 조합장이 성주지역의 자손만대를 위하여 적극 추진한다면 지사장 본인도 적극적으로 후원하겠다고 하였다. 그때에 본인의 생각이 인생은 한번 나서 한번 가는 것인데 성주를 한해 없는 지역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면서 평소의 생활신조였던 정신일도(精神一到)면 하사불성(何事不成)이라는 격언을 다짐하게 되었다. 그 후 여하희 하면 목적 달성을 할 수 있을 까 하고 주야로 계획구상에 몰두하였다. 그 당시 경북도지사 이상희씨는 본인과 초등학교 동창으로 서로 흉금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가까운 사이였다. 어느 날 이상희 지사를 만나서 농진 기술자들의 댐 후보지 조사 내용을 설명하면서 우리 두 사람이 성주를 한발 없는 지역을 만들어서 자손만대에 살기 좋고 자랑스러운 성주를 건설하자고 제의를 하였다. 그후 농진 김태규 지사장을 대동하여 지사실에서 후보지 조사측량 내용과 설명 중에 당시 댐 공사금액 810억이 소요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 후 김지사장의 주선으로 서울본사 사업부장을 만나서 앞으로 사업추진 계획을 협의하고 적극 협조키로 다짐하면서 이 사업은 우리농진으로 보면 측량설게비만 하여 약 40억원의 금액이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관계로 본인과 사업부장과는 밀접한 관계가 한 집안의 가족처럼 되었다. 사업추진의 서울제반정보는 사업부에서 본인에게 전해주기로 약속하고 이와 같은 추진내용을 이 지사에게 설명을 드렸더니 잘 추진하라고 격려의 말도 하였다. 그 후 어느 날 이지사가 한번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가 하여 반갑게 만나보았더니 이 지사의 말이 성주댐은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유는 당시 황인성 농림부장관이 1개 군단위에 거액투자는 어렵다는 말을 들은 본인은 큰 실망을 하면서 또 다시 여하희하면 되겠는가 하는 구상을 한 결과 이규동 장군님을 만나 뵈옵고 보고를 드리기로 생각하여 당시 성주 이씨 성주종친회장 이시웅씨를 대동하여 서울 이규동씨댁을 방문하여 성주댐 현황을 설명 드렸더니 즉석에서 농림부 황장관에게 전화로 고향의 성주댐을 설치하도록 도와 주기 바란다고 하셨다. 그후 농림부에서 경제계획원에 성주댐 설치 요청을 청했는데 경제계획원에서는 문희갑 차관의 주제 하에 심의위원회를 개최하였으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타고하여 유보조치가 되었다는 연락을 농진으로부터 받았다. 그래서 본인은 문희갑 차관을 만나서 자세한 설명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성주군청 재무과장 최근호과장이 문차관 가문최객이라는 것을 알고 엄항섭 성주군수에게 서울출장명령을 받고 본인과 함께 상경하여 문차관을 만났다. 첫 인사에 “당시 국방부 예산국장 장지열, 점촌시장 이원식, 영일군수 김재권씨등과 경북대학교 정치학과 한 반에 공부하면서 문 차관과 경고동기라는 말을 잘 듣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더니 반가워하면서 웃으시었다. 그때 성주댐의 필요성을 일일이 설명을 하였더니 너무나 거액이라서 하면서 하다가 재검토를 해보겠다고 하였다. 그후 셀마호의 폭우로 전국에서 가장 피해가 많은 곳이 성주였다 이때에 정부에서 경제계획원 조순장관을 수반으로 하여 농림부장관, 건설부장관, 내무부차관(당시 이상희), 이상배 도지사 등 많은 분들이 현지 답사를 하였다. 본인은 이때가 성주댐 추진에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하여 즉시 상경하여 이상희 내무부차관을 만나서 성주댐이 있었으면 이와 같은 대홍수 피해가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더니 이상희 차관도 긍정적으로 말하면서 앞으로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후에 농진으로부터 수해복구와 성주댐 설계를 동시에 추진하였으나 농업용수의 단일목적으로 조사 설계를 하기에 본인은 우리 성주가 자손만대에 한해 없는 지역으로 만들기 위하여 또 상경하여 이상희 차관과 협의 설명을 하여 다목적으로 ① 농업용수 ② 생활용수 ③ 홍수조절 ④ 소수력발전등의 명분으로 댐의 규모를 최대의 크기로 만들 것을 부탁하였더니 다행히도 현재의 규모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또 큰 문제가 있었다. 당시의 법이 총공사비 중 70%는 정부가 부담하고 30%는 몽리자 농민이 30년 장기상환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이것을 몽리자인 농민이 알면 반대 데모가 일어날 것 같아서 본인은 불안초조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면서 성주군민은 나의 가족 성주의 토지는 나의 소유처럼 생각하였을 때 앞으로 우리나라가 30년내에 어떠한 변동이라도 있으리라고 믿고 적극 추진키로 결심하였다. 그후 이상과 같은 과정에서 성주댐이 확정되었으나 또 문제가 있었다. 이것을 착수하려면 몽리민의 70%이상 동의서를 징구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농지개량조합의 규모가 몽리 면적 약 2000ha, 직원 조합장이하 정규직 5명과 임시직 4명으로 신설하는 성주댐 몽리구역 5000ha의 목리민의 동의서를 징구 할수 있는 능력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또 서울에 가서 (이상희 내무부장관으로 승진) 이상희 장관에게 도지사와 군수에게 부탁하여 행정력으로 몽리민 동의서를 징구토록 부탁하였다. 그 후 농지 매입과정에서 감정사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감정가가 높이나오면 지주의 수용이 좋고 낮게 나오면 추진에 어려울 것 같아서 감정사에게 제반 여건을 유리한 방향으로 설명했다. 그 당시 토지거래는 전혀 없고 시세는 형성되지도 않을 때다. 일차 감정가 액이 답 평당 12,000~15,000원정도 나와서 이를 통보하였더니 약 70~80%가 매수에 응하여 일시에 많은 보상금 자금이 지불되니 흑자는 대구에 투자하고, 일부는 대토에 투자하고 일부는 은행 예금등으로 보상금 처리가 되고 있었다. 대구에 투자와 대토한 사람은 큰 도움이 되었다고 조합에 와서 고마운 자랑도 하였다. 그리고 이차 감정시 본인은 주민에게 보상금 감정이 많이 나오도록 하기 위하여 현 시가가 일시에 많은 보상금이 지불되니 그 주변 농토가격이 크게 인상된 것을 감정사에 설명을 하여 1차 감정보다 2차감정이 평당 2~3천원 인상되었다. 이 때에 1차 보상금 수령자가 집단항의 데모가 이러나 서 조합장에게 사기 당했다고 욕설과 행패를 부렸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도 없다고 하였더니 소송까지 제기 당하였으나 소송에도 이유가 없다고 판결이 났다. 그 후 부터는 공사장을 점령하여 공사방해작전과 그 주변에 대자보를 써 붙이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타도 농지개량조합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극렬한 데모를 매일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본인의 생각으로는 이것을 여하히 해결할 것이냐 하고 주모자의 인적상황을 파악하여 직접, 간접으로 설득시켜 가면서 공사진행을 하였다. 그 후 또 큰 문제가 발생한다. 공사 중 가제당 직고 약 15m를 막았을 때 대홍수로 배수터널에 배수가 다 안되고 물이 채어지기 시작하고 비는 그칠줄 모르고 계속됐다. 당시 도청 유하성 농지과장과 농진소장 전차홍, 현대소장 정동수, 본인 등 전 관계 직원 전원이 야근하면서 시간마다 담수 체크하니 밤 2시경에는 가제당 상단 1.5m까지 채워져서 붕괴위기에 취했으나 아무도 자신 있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때에 본인의 판단이 사고가 나더라도 인명 피해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당시 김영석 가천면장에게 전화하여 긴급히 사무실로 오라고 하였더니 즉시 와서 면민 대피관계를 협의하여 면직원을 비상대기 하였다가 본인이 비상이다 할 때는 즉시 대피토록 약속하고 김영석 면장은 직원들과 함께 면소에 대기하였다. 다행히도 새벽 4시경에 비가 멈추어서 차츰 가제당으로부터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위험한 고비를 지나고 농림부에 가서 당시 이광범 개발국장에게 상황보고를 하고 앞으로 또 어떠한 비가 올는지 염려가 된다고 하면서 만약 제방이 유실되면 인명피해가 수백 명이 될 터이니 빠른 시일내 본제당을 만들도록 건의하니 예산이 약 50억이 소요되어 국회의 동의 없이는 추가 지불이 어렵다고 하면서 방법은 현대건설 중역과 협의하여 조치토록 하였다. 그 후 본 제방 공사를 급속도로 추진하여 익년 우수기 까지는 본 제당 25m를 축조하여 다소 안심은 하였으나 농림부 이관범 개발국장께서 현장을 보고 제방 내쪽으로 4-5m더 막으라고 지시하여 본 제당으로부터 4m를 높인 후 또 폭우로 이번에는 제당 25m까지 담수가 되어 또 한번 놀랐다. 그 후 어느날 농진본사에서 평야부수로 측량반 10여명이 도착하여 수로 측량계획 설명중 기존 농토에만 통수할 수 있는 내용으로 설명하기에 성주군내의 토지현황이 산이 68% 토지 기타 32%밖에 안 되어 기존농토에만 급수한면 1000ha정도만 공급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때에 본인의 생각이 여하히 하면 성주군내 전지역을 급수할 수 있을까 하고 구상한 나머지 당시 농림부 이관범 개발국장과 협의하기 위하여 농림부에 가서 현황을 자세히 설명할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함으로 퇴근후 만나기로 약속하고 식당에서 성주는 산이 68% 평야 32%를 성주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물은 높이 흘리면 산(生)물이 되고 낮게 흘리면 죽은(死)물이 된다는 원리 설명과 동시에 앞으로 물만 있으면 많은 산을 개발하여 과원과 농토로 활용할 수 있도록 댐의 위치에서 전 군내에 급수계획을 구배대로 설계하도록 설명을 드렸더니 이관범 국장의 대답이 웃으면서 성주촌사람이 포부는 대단하구먼 하면서 그것은 좋을 줄 알지마는 예산규모가 너무 커서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인이 간곡한 설명중 국가사업은 100년대계라고 하는데 물은 다목적으로 담수는 많은데 급수의 대상은 너무 적으니 장래에 후회 없는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조금 어려운 상황이라도 깊이 고려하여 전 군내에 급수할 수 있도록 선처하여 줄 것을 간곡히 수차 반복하면서 술을 권하고 또 설명을 반복하던 중 밤시간은 10시가 가까워지면서 술은 반취가 되면서 되도록 연구해보자고 하였다. 이 때에 본인은 너무나 좋아서 기쁜 마음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식당에서 나오면서 계속 숙소까지 가면서 설계를 전 군내 급수 되도록 지시할 것을 당부하였다. 나는 숙소에 들어가서 다시 어떻게 하여야 확실하게 되겠는가 하는 구상을 해보니 측량반은 성주에 와 있고 정상적인 절차를 진행하려면 신청서를 경북도청경유 농림부로 전달하여야 되는데 이와 같은 절차는 도저히 불가능하여 이광범 국장을 출근시간에 다시 농림부에 들어가서 농진 사장에게 전화지시를 하여 전 군내 구배대로 급수 가능토록 설계지시를 하는 것을 보고 귀성하였더니 이미 농진 한 사장이 현지 측량반장에게 전 군내에 구배대로 설계하도록 지시가 되었다. 이관범 개발국장의 지시대로 측량 결과 현재의 10개 읍면중 금수면만 지형상 급수가 불가능함으로 당시 금수면장 (연순동)농협장(여호연)과 협의하여 양수시설을 하기 위하여 용지매입에 협조하도록 하여 추진중에 있었다. 그 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후 어느 날 농진 공사 기술담당 정병호 반장이 본인에게 종합 컴퓨터 시스템을 설치 추진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때에 본인은 컴퓨터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음으로 반장에게 자료를 가지고 와서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후 자료를 가지고 온 내용이 미국, 일본, 대만 등의 수문조절 컴퓨터 기능 설명을 듣고, 추진할 방법을 여하히 하면 될 수 있는가 라고 문의하니 정병호 반장의 대답이 첫째, 기술분야는 본인이 책임지고 둘재, 자재는 국산 삼성생산품이고 셋째, 농림부에 시행허가만 나면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설명을 듣고 여하히 추진하면 성사할 수 있겠는가 곰곰이 수일동안 생각한 것이 이 사업은 정치적 방법이 아니고 불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그 당시 농업진흥공사 조홍래 사장과 김영삼 대통령과의 사이가 좌, 우, 수의 가까운 분이라고 들었다. 조홍래 사장을 만나는 방법은 농진기술 담당 정병호 반장이 주선하고 조홍래 사장에게 납득이 될 수 있는 명분 설명을 구상한 결과 첫째. 기술담당은 농진 정병호 반장 둘째. 자재는 국산 삼성 제품으로 사용하고 셋째.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를 인용하여 우리나라도 농업용수 컴퓨터 시스템 국가로 등장 할수 있고 넷째. 대내적으로 국제식량협약으로 농민이 허탈에 빠져있는 현실을 정부가 농촌을 위하여 막대한 예산투자를 하여 과학화하는 위로 책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1~4가지의 명분을 작성하여 농진 조홍래사장을 만나서 설명을 드리면서 조사장께서 재임중 기념사업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농진기술로 컴퓨터 종합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설명을 하였더니 쾌히 승낙을 하면서 정조합장과 나와 같이 적극추진하자고 협의가 되었다. 그 후 조수영 농림부 개발국장과 경제기획원 정재호과장과 합석식당에서 본인 설명이 조홍래 농진사장과 상기와 같이 협의가 되었으니 컴퓨터 사업추진에 적극 협조를 요청하였더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경북도청 농지개량과장(박정훈)과장에게도 경위 설명을 드렸더니 긍정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후 컴퓨터 설치 현장 타당성 조사지시가 차일피일 수개월이 지나도록 추진을 하지 않고 유보상태에 있어서 당시 농림부 이석채 차관에게 설명을 드려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컴퓨터 설치문제는 실무 담당공무원들이 이 사업을 부정적으로 보고 진행이 되지 않고 있을 때 당시 김동태 농림부차관보에게 자세한 설명을 드려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어려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본인부터 자신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을 가서 견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농림부 담당과장을 수반으로 하여 본인과 도청 이승재 담당자 농진 기술담당자 등이 미국과 일본을 견학한 후부터는 각자가 자신을 가지고 추진하게 되었다. 그 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후 본인이 늘 걱정을 하는 것은 이 거액의 국고 투자중 30%의 30년 장기 상환금이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김대통령이 농민을 위해서 장기 상환금은 국가가 책임지고 농민은 부담 없이 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때에 본인은 기쁜 마음 형언할 수 없었다. 본인을 잘 아는 농림부공무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정건용 조합장은 선견지면이 있다라고 극찬을 하기도 하였다. 농림부의 인사이동으로 이 사업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진행 중에 있는 컴퓨터 사업을 부정적으로 보고일시 유보하고 컴퓨터 시설이 막대한 금액을 절약하는 의미에서 인력으로 대체할 것으로 검토중이라는 정보를 듣고 즉시 농림부 담당자를 만나서 컴퓨터의 필요성을 설명하였으나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막대한 예산을 줄이고 인력대체가 효과적이라고 주장하기에 본인은 성주는 전국에서 유명항 참외농가에 푹우시 즉시 수문작동을 못하면 수로 하단부에는 막대한 수해를 면키 어렵다고 하였더니 담당자의 말은 어찌하여 성주에만 수해가 있는가 하면서 확인후 조처하겠다고 하였다. 그 다음 담당자가 현지를 확인하더니 본인의 설명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컴퓨터 시스템 종합시설 설치를 계속 추진하게 되었다. 이로써 성주댐은 뜻을 세운지 15년만에 가장 현대적이고 완벽한 농업용수댐 시설의 완공을 보게 된 셈이다. 성주댐이 완공되면서 성주의 방방곡곡에는 언제든지 충분한 농업용수가 공급될 수 있게 되었다. 한발이올 때마다 하늘만 쳐다보고 한숨만 쉬던 모습도 이젠 옛날의 전설이 되었다. 고마운 성주댐... 농민들의 한을 풀어준 성주댐... 그러나 그것은 실로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이룩된 것이었다. 이 댐이 완성되기까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 중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신 분을 꼽는다면 고 이규동 전국노인회장, 이상희 전 내무부장관, 문희갑 전 경제기획원차관, 이관범 전 농림부 개발국장을 비롯하여 조홍래 전 농진공사사장, 이석채 전 농림부차관(당시), 김동태 전 농림부차관보(당시)등이다. 그 외에도 댐이 완성되기까지 15년간 도와주신 분을 일일이 모두 기록할 수 없다. 나는 이분들의 도움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댐의 건설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은 뿔뿔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그분들의 그 공적을 성주군 금수면에 위치한 저 건전하고 웅장한 성주댐의 위용 속에 용해되어 영구히 후대에 유산으로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댐에 담겼던 용수는 성주의 방방곡곡의 농지를 휘감아 돌면서 자손만대까지 풍요를 누릴 원천으로 그 기능을 다할 것이다. 우리 성주는 살기 좋고 자랑스러운 성주가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성주 박약회 창립 10주년을 맞아 기념집을 발간하면서 금년의 을유년과 60년전의 을유년을 매우 뜻이 깊다. 성주댐 건설의 전말을 이 책에 간략하게 싣는다.
최종편집:2025-05-15 오후 01: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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