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인생살이 중 여러 성공담이 있지만, 어제 고인이 된 `고독한 승부사 박종환`의 신문 기사가 있어 그 느낌을 적을까 한다. 박종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1983년 멕시코 청소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룬 것이다. 그것도 북한이 지역 예선에서 심판 폭행으로 국제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받으면서 우리에게 기회가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30년간 월드컵 본선 진출도 없었으니 축구협회는 박종환 감독에게 출전하지 말라고 압박했지만, 이런 기회를 차버리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 끝에 출전하여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 만 것이었다. 그의 별명이 혹독하고 강압적인 훈련에다 강한 카리스마로 일시적 악명은 높았지만 `영예로운 독사`였다. 성공담이었다. 같은 날 신문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백신의 어머니`라는 커털린 커리코가 실렸다. 그는 헝가리 가난한 정육점 딸로 태어나 유전 물질 리보핵산(mRNA) 연구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로 연구비까지 끊겨, 미국으로 이민했다. 남편은 미국 영주권을 받으러 헝가리에 갔다가 행방불명이 됐으며, 두 번의 암 수술도 받는 그 고난 속에서 우연히 만난 와이스먼과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단백질로 바이러스 치료제 연구에 의기투합하여 펜데믹 종식시킬 백신 개발에 성공, 세계적 코로나 확산에 구세주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커리코와 와이스먼은 공동 수상자가 된 것이었다. 가난해 사무실 바닥에 침낭 깔고 생활했던 고난의 결과였다. 오래 전 내 중학생일 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살아난다. 세계 발명왕으로 불리는 에디슨은 학교 성적은 중간쯤이던 20등인 열등생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궁금하여 알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에디슨!`이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가 창고 문을 열었더니 컴컴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너 뭐하니···` `응! 엄마 나 병아리 낳고 있어` 했다. 아이를 일으키니 달걀을 품고 있었다. 그 아이가 전기 등 1천3백여 가지 발명품이 있었으니 발명왕의 닉네임이 붙은 것이다. 6·25전쟁 이후 우리는 필리핀보다 더 후진국인 국민소득이 겨우 60달러였다. 이럴 때 악명 높은(?) `5·16`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보다 `배고픔 해결`이 급선무였다. 소비보다 생산이 먼저였다. 쌀밥 금지로 가정은 물론 초·중·고생에게 도시락은 쌀·보리와 잡곡 반반이어야 했다. 점심시간마다 도시락 검사를 담임이 할 일이었다. 그러다 어떤 날은 아예 쌀을 먹을 수 없는 무미일(無米日)을 제정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세계 경제대국이 된 것이었다. 세상사 거저 되는, `공짜`는 없는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중학생일 때 학교 책상에 `장래 희망(꿈)은 대통령`이라는 팻말을 달아 놓고 공부했다는 사실은 다 아는 얘기다. 누구나 뜻을 세운다고 다 이뤄지지는 않지만, 그러나 `꿈`을 품는 것만은 `인생살이`에서는 그 자체로도 누구나 의미가 있는 일이리라. 또 생각나는 분이 있으니 내 고향 2선 국회의원인 김창환 선배를 떠올리게 한다. 어느 정치인이나 순풍에 돛을 단 듯 쉽게 `민의의 전당 입성`은 쉽지 않은 것이 통설임이 상식이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국회의원` 꿈을 꿨다고 알려져 있다. 육군 중령 출신이고 내 지사학교 동창인 김병달 친구를 근년에 만났을 때, 우연히 `인생살이 성공` 얘길 하다가 내게 귀띔을 한 얘기가 있었으니 바로 김창환 얘기였다. 김창환 의원.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의도 입성` 꿈을 이루려 정치인의 최소한의 기초 자질인 웅변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웅변은 연설과 엄연히 다르다. 연설은 조곤조곤 의례적(儀禮的) 설명만 잘하면 되지만, 웅변은 조리 있게 유창한 어조로 수많은 군중 앞에서 유권자의 마음을 휘어잡는 감성에 호소해야 하는 것이 웅변이다. 물론 김창환의 출중한, 결기 있는 액센트가 유세장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의 유세장 여의도가 떠오른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숫자인 30만이었다. 사실 신익희의 웅변적 연설은 들은 적도 없지만 그만큼 웅변이 차지하는 중요함이 크다는 말일 것이다. 이를 초교 시절부터 대비해 소 먹이러 산에 올라 빈 산골짝 소나무를 군중으로 생각하고 온 힘을 쏟아 포효(咆哮)를 했다니, 어찌 그렇게 일되게, 소년적일 때부터 큰 꿈을 꿨던지 지금 들어도 `역시는 역시`일 뿐이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될성부른 나무는 자엽(子葉)부터···`가 아닐까 한다. 결례였다면 관용하소서. 초선 출마일 때 합동연설회가 왜관에서 있었다. 출향인 `성주 수륜(윤동)`의 자긍심이 먼저 발동했으니 직장 점심시간을 이용해 연설회장엘 갔다. 그때 공화당의 폭정을 향해 `···부정부패를 척결합시다!`의 그 포효가 얼마나 컸던지 관중의 박수가 쏟아졌다. 그 함성이 지금도 나의 뇌리를 장악하고 있다. 당시의 정정은 얼마나 엄혹했던 때였던가 말이다. 말 한마디 잘 못하면 `남산(중앙정보부)`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던 시절이었으니···. 은퇴한 이후 `헌정회 운영위원장` 직함은 물론 원로로서의 기여도도 있었다. 그 군중을 휘어잡던 포효를 늘 간직하시고 부디 강건(剛健)하시길 무명 후배가 기원합니다.
최종편집:2024-05-14 오전 1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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