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날아온 전보 한 장에
퇴직을 삼개월여 앞둔 그가 짐을 싼다
이것저것 쏟아져 나오는 사물함을 뒤지다가
이제는 쓸 일 없을 겨울털모자와
잘 빨아서 입으라며 참 따뜻하다며
기름때 전 동절용 작업복도 함께 던져준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 가까웠던 것일까
떠나감을 준비하는 그는 말이 없고
지켜보는 우리들도 말이 없다 하룻내
지나가는 열차의 꽁무니에 뒤엉켜
철없이 피어난 찔레꽃처럼 흔들릴 뿐
야근을 마친 아침 퇴근길에야 우리들은
기운 햇살 줄줄이 스며드는 역전 골목
함바집 뒷방에 모여 보글대는 곱창전골로
송별식을 한다 서로가 빈 속인지라
몇 잔의 선술에도 불기둥이 서고
눈자위와 귓불에는 금방 꽃물이 든다
그러하다 선로변에 뼈를 묻은 우리들
어디에 간들 어디에 어떻게 남은들
두 줄기 선로 위가 아니랴 오고가는
기적소리에 가는 귀 먹는 일 아니랴
서로 남몰라 하는 세상 서로 보듬은
우리들, 부드럽게 달라붙는 연결기처럼
뜨겁고 깊은 송별주를 나누자,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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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다른 이들이 잊고 있는 동안 제 몫의 할 일을 다 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있다. 들국화처럼, 아니 더 이름도 모르는, 풀더미에 숨어 사는 들꽃처럼, 빛나는 삶은 아니지만 정말은 빛나지 않는 것이 아니요, 이름 없는 것은 더욱 아닌 사람들..... 우리가 때로 여행을 나서면서 철로변에 무더기로 피어난 꽃들을 보며 감탄할 때도, 그 꽃을 거기 심어 가꾸는 ‘선로변에 뼈를 묻은’ 사람들의 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서 그들이 없는 것이 아니듯이.
‘두 줄기 선로 위’에 살면서 ‘오고가는 기적소리에 가는 귀 먹는’ 사람 하나가 퇴직을 삼개월여 앞두고 또 다른 역으로 떠난다. 쓰다 만 ‘겨울털모자와’ ‘기름때 전 동절용 작업복’을 후배 역무원에게 던져주는 사람, 이 겨울을 마지막으로 영영 선로변을 떠나야 하는 늙은 철도노동자의 전근을 아쉬워하며, 함께 '보듬어' 일해 온 동료들이 ‘야근을 마친 아침 퇴근길’에 역전 골목 함바집에서 곱창 전골과 몇 잔의 선술로 ‘뜨겁고 깊은’ 송별의 아픔을 달랜다.
이 시는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그러면서 세계를 견고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낸 시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자기 일의 가치에 확신을 갖고 흔들림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빚어내는 질그릇 같은 삶의 아름다움에서 나온다.
문득 선술 한 잔 콸콸 따뤄 그 자리에 불쑥 끼어들고 싶은, 이 조촐하여 빛나는 송별식이 이 땅에서 끝없이 이어지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역사(驛舍)에 들어설 때마다 그들과 눈 마주하여 인사하고 싶은 마음 더 간절해지고, 그로 하여 떠나고 돌아오는 우리의 발걸음이 더욱 가볍고 행복해지기를!
배창환(시인 · 성주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