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떠나 1995년에는 그 동안 연마해 온 영어, 일어를 실전에 사용해 보고 싶고, 선진문화를 보면서 견문을 넓히기 위해 단체관광여행이 아닌 혼자서 현지인들을 만나면서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지난 6월 초에는 5박 6일간 일본 큐슈를 여행했는데, 그 때는 배편을 이용했었다. 비행기 타고 제주도에도 한 번 안 가본 처지인데 혼자서 유럽여행을 하는 것이 망설여지기도 했으나, 이것저것 따지면 절대로 옷 떠나기 무조건 떠나라는 배낭여행 안내서를 읽고서 용기를 내 강행하기로 했다. 7월 28일에 떠나서 8월 6일에 돌아오는 11박 12일간의 일정으로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왕복티켓과 지도, 유러레일패스와 유럽 각 국의 열차시간표만 가지고, 첫 기착지인 프랑크푸르트에 호텔 예약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떠났다. 라인강의 로렐라이 언덕에 가다. 지난 번 일본여행에서와 같이 옆에 있는 외국인은 모두 대화상대로 삼기로 하여 대구공항에서 평화발레오에 근무한다는 스위스인 페이지(26세)를 만나서 서울까지 같이 갔다. 국제신청사에서 탑승시간이 남아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한식이 없어서 햄버거를 두 개씩이나 먹고 난 뒤 4층에 가보니 한식이 있기에 다시 먹었는데, 기내에서 두 번이나 식사가 나왔다. 비행기는 부산을 거쳐 중국 상해로, 다시 북경, 울란바트로를 거치는 코스로 약 12시간이나 걸려 무척 힘이 들었다. 왼쪽에는 구미 LG전자 고문인 56새의 보스니아 공화국인, 오른쪽에는 BMW에 근무하는 독일인이 탔다. 모두 친절하였는데 독일인이 이상한 냄새를 피우며 계속 피리소리를 내기에 알고보니 한 번 뀌면 1분 이상씩 뀌는 방귀를 수도 없이 뀌는 바람에 곤욕이었으나, 입고 있는 가죽잠바가 7년이나 됐다는 점은 본 받을 만 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리기 직전에 앞좌석에 앉은 일본인이 옆 사람과 한마디 말도 없이 12시간을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보고, 일본어로 물어보니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인데, 공항에 가면 먼저 도착한 동료가 기다린다고 해서 동행을 구하는데는 실패하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렸다. 허허벌판에 홀로 선 막막한 기분이었으나, 내가 태어나서 지구반대편인 유럽에까지 왔다는데 감회가 깊었다. 역에 가서 유러레일패스에 날짜와 사인을 받고 마인쯔행 기차를 타고 30분정도 가서 내렸다. 저녁 8시경이 다 되어서 숙소를 구하려고 관광안내소를 찾았는데, 젊은 배낭족 3명이 있어 한국인인가 하고 물어보니 일본 케이오대학 독일어과 학생들인데 자기들도 유스호스텔을 구하는 중이라고 하였다. "나도 같이 가자"하며 시내버스를 타고서 유스호스텔을 찾아가서 한국에서 발급받은 유스호스텔 회원증을 주니, 침대시트와 아침식사 티켓을 주었다. 요금은 20마르크(한화 1만원 정도)였으며, 숲속의 별장 같은 휴식처였고, 짐을 풀고 샤워실에 가서 더운물에 샤워를 하고 벤치에 누워 있으니 별천지 같았다. 그 날 저녁 헝가리 대학에 연수중인 한국화약 직원인 강인구씨와 일본인 3명, 대만인 1명 등 6명이 함께 잤는데, 대만 친구는 양말 등을 말리기 위해 침대 옆에 칠 빨랫줄까지 준비하고 다녔고, 강인구씨는 나침반, 자명종 등을 준비해온 것을 보고 나보다 한수 위인 것을 알았다. 아침에 식당에 가보니 세계 각 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붐볐고, 시트를 반납하고 버스를 타고 가까스로 8시 40분발 라인강 유람선을 탔다. 약 5시간정도 가는데 좌우에 팔쯔성 등 그림같은 성이 많이 나와서 사진찍기에 바빴다. 라인강의 중류에 우뚝 솟은 전설의 로렐라이 언덕에 오니 "웬일인지 알 수 없네. 다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아주 옛날의 한 얘기가 왜 이다지도 쓸쓸한 것인지....."로 시작되는 하이네의 시(로렐라이)를 가곡화한 귀에 익은 노래가 마이크를 통해 유유히 들려왔다. 그 유람선에서 한 달 동안 유럽여행중인 김상헌이라는 학생을 만나서 정보를 많이 얻었는데, 특히 로마에서는 아가씨가 확 달려들어 가방을 낚아채 간다면서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일본인과 배에서 헤어진 후 코블렌쯔에 내려서 예정에 없던 룩셈부르크까지 기차를 타고 갔는데, 거기서 뿔뿔이 헤어지고 혼자 남았다. 역에 가서 물어보니 스위스 바젤행의 야간열차가 1시 18분에 있는데 그때 가서 추가요금을 지불하면 간이침대에 누워서 갈 수 있다기에 그렇게 믿고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시내로 나갔다. 그 날은 토요일이라서 가게문을 모두 닫았고, 환전을 해 오지 않아 배낭을 락카에 넣을 돈도 없어서 막막하기만 했다.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길을 가다 보니, 자동금전지급기가 있기에 비자카드를 넣고 벨기에 프랑으로 3,000프랑을 뽑아 손에 넣고 보니 정말 편리한 세상임을 느꼈다. 다시 역으로 가서 락카에 배낭을 넣고서 시내를 불러보았다. 조그마한 구릉지대도 멋지게 조경을 하여 도시 전체가 하나의 인형처럼 아기자기했고 언덕 위의 카페 거리 한쪽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한쪽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광장전체가 불야성인 가운데 축제마당이었다. 조금 있으니 공터에 청년 한 명이 나와서 서커스를 펼쳤다. 모두가 각 국의 여행객들이니까 영어로 하는데, 앞에 앉은 나를 보고는 토요타, 아이와, 미스비시 등 일본의 유수한 회사를 들먹이면서 일본인이냐고 하기에, 일어나서 서울에서 왔다고 하자 모두가 웃어버렸다. 앞에 앉은 아가씨가 머리카락을 붉게 염색하고 열심히 흥을 내고 있기에 "당신은 왜 머리를 붉게 염색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그것은 오로지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역시 명답이었다.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스위스로 새벽 1시 18분에 차를 타니, 독일기차였는데 예약은 안 했지만 추가요금을 지불할테니 침대차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여러 승무원에게 부탁해보더니 안 된다고 해서 일반좌석에서 자기로 했다. 가방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발 밑에 두고 잤는데,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 5시 50분에 어딘지 모르겠고 하여 무조건 내리니, 예정대로 스위스 바젤이었고, 테른행 기차가 7시 20분에 있어서 빵을 하나 사서 먹고는 다시 기차를 탔다. 마주보고 앉은 할머니가 영어를 60년 전에 배우고 잘 사용하지 않지만 조금은 한다고 하였다. 머리가 녹슬지 않게 하기 위해 가로 세오 단어맞추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기에 나이 등 온갖 것을 물어보니 "당신은 왜 그렇게 많은 것을 물어 보느냐. 그러나 새롭게 영어를 쓰니 기억이 되살아나서 괜찮다"고 했다. 혼자서 사느냐고 물어보니 "I live with God"라고 의미 있는 대답을 했으며, 알프스산맥의 산골 조용한 호텔에 30일간 쉬기 위해 가는 중이라기에 갈아타는 기차까지 짐을 들어 주니 "Korean wounderful!"이라고 해서 기분이 괜찮았다. 엔트라겐오스트행 기차를 타서 부산에서 파리에 영어 연수 온 여선생을 만났는데, 파리에서 영어 연수중 이틀간의 휴가기간에 알프스가 보고 싶어 무작정 왔다기에 "당신 참 용기 있다. 용기있게 행동하니 동료들보다 알프스를 더 보고 갈 수가 있지 않느냐"고 격려해줬다. 배고픈 참이었는데 비스켓을 잘 얻어먹었다. 산악기차를 타고 3.454m의 융프라우에 오르는데 마을의 풍경이 그림책에서 보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고, 낙원이었다. 2,000m 이상에서는 기차가 지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암벽동굴 속을 달렸으며 정상에는 얼음궁전이라 해서 동굴 전체가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눈앞에 유럽 최대의 알레치 빙하와 융프라우 연봉이 눈앞에 펼쳐지고, 왼쪽에는 유명한 아이거빙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알프스산의 까마귀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는 휴게실에 들러서 스위스제 등산용 칼을 사고 시간이 다 돼서 나오는데, 같이 놀라온 여선생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기에 시간이 다 됐는데 빨리 안내려가느냐 하자 다음 차를 타고 내려가겠다고 했다. 나중에 책을 보니 그 곳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우체국으로 그 곳에서 엽서를 써서 융프라우 우체국 소인을 찍어 보내면 기념이 된다고 적혀 있었다. 예정에는 그 날 저녁 밤차를 타고 로마에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전날 기차 안에서 잠도 못 잤고, 도저히 체력에 자신이 없어서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 다시 가서 1박을 하기로 했다. 역에 내리니 돈이 200프랑 밖에 없어서 안내소에서 55프랑(한와 35,000원)짜리 호텔을 소개받아 짐을 풀고, 별도로 된 샤워장에 가서 샤워를 하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역에 저녁을 먹으로 갔는데 서양음식을 도저히 먹지 못하여 슈퍼에 들러서 잼 한병과 과일을 사서 먹었다. 다음날, 아침 6시 50분 로마행 차를 타기로 하고 잤는데 일어나니 6시 35분이어서 아침도 안 먹고 뛰었으나 차를 놓쳐버리고 브리그와 밀라노에서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7시 20분발 기차에 몸을 실었다. 16시 55분에 로마역에 도착하는 8시간의 기차여행이었는데 좌석에 붙어 있는 테이블을 펴고 룩셈부르크에서 산 팔뚝만한 밀빵에 잼을 바르고 융프라우에서 산 칼로 사과를 깎아서 먹으니, 누가 달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그 맛이 일품이었다. 아침에 알프스산 속을 달리니 한쪽에는 호수가 펼쳐지고, 한쪽에는 눈덮인 알프스 산이 병풍을 이루고 그 사이에 떠 있는 유람선과 그림 같은 집들을 보니 그 기분이 절정이었고, 나중에 알고보니 그 길이 알프스 기차여행의 가장 좋은 코스였다. 기차 안에서 지도와 열차시간표를 보고 로마에서의 스케줄을 짜고, 다시 는 예약을 해서 낭패보지 않기 위해 2일날 저녁 9시 로마에서 제네바까지 야간 침대차를, 다음날 9시 30분 제네바에서 파리 리용역까지 TGV를 예약하기로 했다. 8시 59분에 브리그에 도착해서 9시 10분발 밀라노행 기차선로를 알아놓고, 스위스에서 2일 후의 로마기차가 예약이 되겠나 싶어 물어보니 된다고 하는데 예약비가 없어서 곤란하다고 했다. 비자카드로 결제하고 고비를 넘기고는 동전도 없고, 루프트한자 항공사 전화번호도 몰라서 길을 건너 아무 여행사나 찾아가서 넉살좋게 루프트한자 스위스지점에 6일날 서울행 비행기의 예약을 확인하고 싶다고 했더니, 직원이 해주면 3프랑을 받고, 내가 직접 전화를 하면 무료하고 해서 전화를 걸어보니 통화중이었고, 기차시간이 다 돼서 아쉽게 포기했다. 이번에는 일등칸에 들어가니 사람들의 차림새가 고급이었고, 시끄럽지도 않아서 여행메모를 하면서 왔다. 밀라노역에서 갈아타고 로마에 가까이 오니 철로변 담벽들이 온통 낙서투성이었다. 배낭을 로마역에 맡기고 5시경 뭇솔리나가 1942년에 착공하여 전쟁 후인 1950녕에 완성했다는 선로수가 20개 이상이 되는 테르머니역에 도착해서 별 세 개급 호텔을 찾아가니 20,000리라(4만원)라면서 보여주는데 베른에서와는 달리 욕실과 TV까지 있었다. 이태리는 바가지가 심하다기에 더 싼데가 있는가 싶어 나왔다가 필름 1통을 9,000리라에 사고 이태리 관광국(ENT)에 물어보니, 역근방에는 집시와 마피아가 우글거린다면서 12만리라 정도하는 방을 구하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인 영화감독 차재춘씨 집으로 전화를 하니 105번 시내버스를 타라기에 버스를 앞으로 그냥 탔는데 아무도 요금내는 사람이 없어서 주위사람에게 물어보니, 영어하는 사람이 없어서 무료는 아니지 싶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내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1,500리라짜리 티켓을 사서 뒷문에 설치된 기계에 날짜를 찍어야 하는데 표 검사는 잘 안 하지만 만약 적발되면 외국인이라 몰라서 그랬든 어쨌든 무조건 10만리라의 벌금에 처해진다는 것이었다. 어렵게 차 감독의 집에 찾아가니 성악공부를 하고 있는 한국인 부부와 차 감독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에 비가 온 것이 7년만에 처음이라면서 빗소리가 들리는 방갈로에서 삼결삽을 김치와 서양상추에 싸서 먹으니 그 기분도 괜찮았다. 다음날. 아침도 안 먹고 로마역에서 나폴리까지 2시간을 달려 갈아타고 폼페이역에서 내렸다. 폼페이우스는 역에서 2㎞되는 거리로 택시를 타야된다며 15,000리라의 요금을 달라고 했다. 브라질인 2명, 동일인 2명, 총 5명을 만들어서 3,000리라씩 주기로 하고 가보니 커브길 돌아서니 바로 매표소였고, 거기서 불과 500m정도 밖에 안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로마 부호들이 세게 최대의 미항인 나폴리 항구의 장관을 즐길 수 있는 별장지로 화산재 속에 묻혀 있다가 서기 1879년에 발굴되었는데, 그 모습은 2000년전 그대로였다. 화산재가 뜨거워서 엎드려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 목욕탕 안에는 누워 있는 모습의 화석도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부패해서 화석이 될 수 없는데, 당시 박테리아가 침범할 틈도 없이 화산재가 바로 덮쳐 인간 몸 속의 수분, 지방, 단백질 등이 화산재로 빠져들고 그대로 굳어져서 화석이 되었는데, 발톱도 그대로 있었고, X-레이 촬영을 해보면 내장이 그대로 있으며, 병은 매독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2000년 전에 이미 상하수도가 완벽히 시설되어 있었고, 도로는 돌로 완벽하게 포장되어 있었으며, 마차가 다닌 바퀴자욱이 선명하게 나 있었을 뿐아니라, 물을 먹기 위해 사람이 걸터앉으면서 짚은 손자국으로 우물 테두리의 돌이 깊이 파였는데 당시도 오른손잡이가 많았는지 오른손으로 짚은 곳이 더욱 깊게 파여 있었다. 어느 상인 집 현관에는 완벽한 개 한 마리가 타일로 모자이크되어 있는데, 그 앞에는 라틴어로 `개조심`이라고 적혀 있었고, 세탁소에서는 많은 동전이 발견되었는데 그 날 마지막 매상고였던 모양이었다. 창녀촌은 3거리에 위치하여 1, 2층에 침대 5개씩이 있었는데 통로가 개별로 되어 있었고, 침대의 길이도 달랐으며, 전문화되어서 방문 위에서 자기가 구사하는 섹스기술은 이런 것이라면서 성교장면이 각기 다르게 그려져 있었다. 변소에는 자기 단골손님이 어떻다는 등 온갖 낙서가 그대로 있었는데 그들 모두 로마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빈부의 격차가 있어서 사우나실 안의 분수대에는 `누구누구 기증`이라 적혀 있었고, 부자들이 사는 압구정동 거리(?)는 다른 곳보다 마차길과 인도가 넓고, 높게 포장되어 있었으며 바닥에 야광표시까지 되어 있었다. 6시경 로마역에 도착한 후 역 앞의 공화국 광장에서 만국 공통음식점인 맥도날드에 들러서 저녁을 먹고, 다음날 목적지인 바티칸 성당엔 샌들과 반바지는 입장불가라고 해서 먼저 9,900리라(4,500원)을 주고 긴바지를 하나 샀다. 그 유명한 뜨레비 샘을 찾아가다가 1911년 이태리 통일기념으로 세운 석조건물로 양쪽 옥상에 거대한 조각이 있으며, 2차대전 때 뭇솔리니가 군중연설을 했다는 베네치아 광장에 들러 한국인 대학생 3명을 만나서 같이 가던 중 신발가게 들렀는데 종업원 아가씨가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뻐서 우선 신발을 사겠다면서 고르고 나서 "내가 유럽에서 본 사람 중 당신이 제일 예쁘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느냐"고 했더니, 수줍어하면서 얼굴을 붉혔는데 그 옆의 동료 아가씨가 대신 거절하는 바람에 사진찍기에는 실패했다. 1762년에 교황주최의 분수콩쿠르에서 우승한 작품이고, 밤이면 세계의 온갖 여행자들이 다 모여드는 뜨레비 샘을 뒤에다 주고 동전을 던졌는데 들어가지 않아서 로마에는 다시 못올 줄 알고, 영화「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137계단이 있는 스페인 광장으로 가는데 일본인 깃발부대 관광객을 만났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저 사람들도 분명히 스페인 광장으로 가는 중인 것 같은데 뒤따라만 가자"고 해서, 여러 사람에게 묻느니 그 방법이 최고다 싶어 한참 따라가는데, 어느 건물안으로 들어가기에 이상하다 싶어 간판을 보니 일식집이었다. 한바탕 웃고 다시 스페인 광장에 와 보니 아이스크림 장사도 없고, 오드리 햅번이 앉았던 계단은 수리중이라서 사진만 찍고 로마역에 가서 다시 차 감독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승객중 한 할머니가 차가 빨리 출발 안한다고 고함을 치자 옆에서 맞장구를 치고 급기야는 모두가 손뼉을 치면서 장단을 맞추는 것을 보고 우리와 달리 체면 갚은 것은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에 숙박비를 주고 배낭을 로마역에 맡기고 바티칸 박물관에 들러서 고대 조각관에서 아폴로, 라오콘 군상(群像), 몸통만 조각한 토르소 등을 보고 시스턴 성당에서 내려가니 수백명의 사람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서서 머리를 모두 다 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진만으로 보던 천지창조와 최후의 만찬이 천장에 그려져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누운 자세에서 4년동안 그렸다는데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동작과 표정에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천지창조 후 20년만에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영생과 형벌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드라마틱한 장면이 장엄하게 펼쳐지는데, 상단 중앙에는 강인한 모습의 그리스도가 있고, 400여명의 구원받은 자들의 입맞춤과 포옹 등 만족한 장면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가죽을 벗기는 처형을 당한 성바르톨로메가 인간의 가죽을 들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얼굴이었다. 거기서 대예술가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신 앞에 고백하고 있었다. 그 반면 오른쪽 하단에서는 지옥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들의 군상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천지창조」작업장에 나타나 그 그림이 외설적이라고 혹평한 추기경이 지옥의 심판관 미노스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추기경은 나중에 후회를 하고 교황에게 제발 자신의 모습을 지워주기를 간청했으나, "만약 그대가 천당에 있다면 내가 손 쓸 수가 있으나 그 밑에(지옥) 있으니 난들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한다. 여기서 붓을 가진 사람의 특권을 또한 엿볼 수 있었다. 바티칸 성당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미켈란젤로가 24세때인 1499년에 제작한 비탄이 있는데 십자가에서 내려진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젊은 성모의 체념한 듯한 슬픔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었고, 조금 더 가면 순례자의 입맞춤으로 닳아져서 새로 보수한 성베드로의 청동좌상이 있고, 크리스마스미사 때 모이는 중앙제단 위에는 베르니니가 제작한 천개(天蓋)가 있는데 그 높이가 무려 29m가 되고 중앙돔의 높이는 63빌딩의 ⅔라니 그 규모가 엄청났다. 그런데도 쇠기둥 하나 없이 돌로 되어 있고 인공조명 하나 없이 자연채광으로 밝히고 있으니, 천재건축가 미켈란젤로의 믿기지 않는 기술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나보냐 과장의 3개의 분수 중 중앙에 있는 것이 4대 강의 분수이고, 4개의 석상을 베르니니가 설계하고, 이 분수 바로 앞에 있는 성아녜제 성당은 보르미니가 설계했는데 두 조각가는 라이벌관계였다. 베르니니는 분수 앞의 성당이 무너질 것 갚아 플라타강을 상징하는 대리석상은 놀란 듯 성당을 보고 손을 들고 있고, 나일강을 상징하는 대리석상은 성당을 아예 외면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성당의 종탑 아래에 있는 성아녜제 대리석상은 가슴에 손을 얹어 이들을 안심시키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역시 예술에 있어서도 라이벌 의식이 필요한 것 같았다. 파르테논 신전을 거쳐서 콜롯세움에 다다랐다. 서기 72년에 견고한 벽돌을 구어서 그렇게 큰 경기장을 만들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황제가 직접 피비린내 나는 검투경기에 참여도 하고 햇빛이 강할 때는 해군에 명하여 천막을 경기장 전체에 둘렀다 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농민들은 성격이 거칠어져 고향에서 농사지을 의욕을 잃고 수도 로마로 몰려들었고, 그들이 요구한 것은 땅이 아니라 빵과 서커스다. 결국 콜롯세움에서의 경기가 쇠퇴해질 때 로마도 망하고, 그 후 방치되어 폐허가 된 채로 목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거기서 기독교인들의 지하무덤인 카타콤베를 프랑스 부부와 같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겨우 찾았으나, 올 때는 버스가 없어서 1시간 이상을 헤매다가 녹초가 된 채 로마역에 도착해 입수한 정보대로 지하에 내려가서 샤워를 하고 났더니 살 것만 같았다. 내친김에 이발도 하려고 들어갔는데, 나는 1㎝정도만 잘라달라고 했더니 이발사는 1㎝만 남기고 다 자르려고 하고 영어도 통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우여곡절 끝에 출발 1초전에 9시발 제네바행 야간 침대차에 타니 미국인 1명과 이태리인 1명, 스위스 남녀가 있어서 폼페이우스에서 본 창녀촌 등의 유적을 그림책과 함께 설명해 주었으나 이태리인도 잘 모르고 있었다. 저녁에는 물 한 병을 주고 아침에 일어나니 빵과 차 한잔을 주었다. 역사책에 나오는 국제회담이 자주 열리는 제네바에서 내려서 쓰다 남은 스위스 프랑을 꺼내서 화장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 사진 한 장을 찍고 TGV를 타고 프랑스로 갔다. TGV를 타고 프랑스로 리용역에 내려서 경찰에게 안내소가 어딘지 물어도 불어로 말하니 알아듣지를 못했다. 한참만에 겨우 찾아서 지도 한 장 받고 3일 동안 쓸 수 있는 지하철 승차권을 사서, 안전하게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로 전화해서 몽마르트로 갔다. 별 2개짜리 호텔이었는데 사실 규모는 여인숙 규모였다. 여장을 풀고 지도를 펼쳐서 지하철 타는 곳과 관광지 위치를 표시하여 저녁 6시에 관광을 나섰다. 우선 몽마르뜨 언덕을 둘러보고 지하철을 개선문에서 내려서 상젤리제 거리를 지나 콩크르트 광장까지 가다가 네덜란드 청년을 만나서 에펠탑에 같이 가자고 했더니, 자기는 갔다왔다면서 정중히 거절해서 저녁 11시경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은 아침 10시에 출발하여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하니 줄을 잔뜩 서 있었고, 비싸게 주고 산 생수마저 안 된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다 마시고 들어갔는데, 연 입장객이 600만명, 입장료 40프랑(약 6천원)이니, 연 입장료 수입만도 360억이 되는 셈이다. 유물 40만점이 대부분 나폴레옹 원정 때 빼앗아온 전리품이고, 박물관의 규모가 기억도 못할 만큼 어마어마했다. 역사는 항상 강자의 편인가보다. 밀로의 비너스는 통로 중앙에 있었고,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의외로 작은 그림이었으며 방탄유리로 봉해져 있었다. 오르세 역을 개조한 오르세 박물관에는 책에서 많이 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있는데, 밀레의 「이삭줍기」, 「만종」, 고갱의 「티히티의 여인들」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 익은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가 있는데 그 당시 파리에서 상류층이면 다 알 수 있는 술집 마담이 정장을 한 신사들 앞에서 나체인 채로 관객을 향해 장면으로 쳐다보는 모습인데, 당시만해도 어떻게 이런 걸 그릴 수 있느냐면서 파리시내가 발칵 뒤집힌 그림이었다 한다. 다시 퐁피두센터에 들러서 현대미술을 감상하니 산듯한 기분이 났다. 거기서 에펠탑으로 오니, 이태리에서 온 청년들이 근사한 복장으로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잔치가 벌어져서 구경을 하다가 세네갈에서 온 흑인에게서 장난감 새를 사서 숙소로 왔다. 다음날은 로뎅 미술관에 맨 먼저 도착하여 문열자마자 입장권을 사려니 거스름돈이 준비가 안되서 일등으로 입장을 못했다. 건물안에서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한 "입맞춤"과 로뎅의 작업실을 둘러보고 로뎅하면 생각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작게 조각이 되어 있기에 `원래 이렇게 작은 조각이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정원으로 나와보니 그 곳에 "생각하는 사람"과 "깔레의 시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로뎅박물관을 나와서 매주 토요일 12시에서 1시까지 열리는 골동품 시장을 찾아갔다. 온갖 것들이 많았지만 촛대를 130프랑에 샀다, 세상에는 언제나 괴짜가 있기 마련, 자기 물건파는 데는 신경도 안 쓰고 옆점포에 가서 농담이나 하던 털보아저씨에게 물건 가격을 불으니 영어가 안통해서 숫자로 써달라고 했더니 필기구를 달래서 볼펜을 주니까 옆에 있던 일본아가씨의 손을 억지로 펴서 그 손바닥에 300이라 적어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다시 교외선을 타고 베르사이유궁전으로 찾았다. 그 규모와 사치스러움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화장실이 입구쪽에 한 군데 밖에 없는데다 유료라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그 날은 저녁 8시경에 일찍 귀가하여 그 호텔에서 3일만에 처음으로 두부찌개를 시켰다. 물은 방에 있어서 주문을 안했더니 주지 않았다. 식사 중에 물 한모금 없이 식사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아침 10시에 출발하여 드골 공항에서 2시 40분에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타려고 교외선으로 갈아타니 10시 20분발인데 10시 50분이 넘도록 그대로 있어서 승객에게 물어보니 고장이란다. 안내방송도 없이 흑인청년 1명이 와서 버스 타고 가야된다기에 망설이고 있는데 2시간이 늦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나 둘 기타에서 내리기에 버스요금은 얼마냐고 물으니 350프랑이라고 했다. 이미 돈을 다 써버린 마당이어서 큰일이었다. 우왕좌왕하다가 버스요금은 무료겠지하는 말이 들리기에 일단 큰 무리를 따라 갔다가 겨우 임시버스를 타고 가는데 또다시 내려서 열차를 타게 했다. 프랑스인들의 무성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옆에 있는 영국인에게 물으니 비행기를 거의 대부분 놓쳤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20분전에 루푸트한자 항공 대합실에 도착해서 이제 살았구나 싶어서 사진을 한 장 찍고는 프랑크부르트에서 다시 갈아타고 서울에 안착한 것이다. 6월초에 일본 벳푸 역 앞 골목길에서 만나서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는데 액세서리 리어카상을 하던 오페이어라는 이스라엘 청년은, 26세인데 군에서 제대하고 일본에 와서 새벽 3시가지 장사를 하는데 많이 벌면 4만엔을 번다고 했다. 봉고를 빌려서 거기에 좌판을 싣고서 다니면 그 안에 간이침대를 만들어 놓고 벳푸 해안에 차를 대어놓고, 잠을 잔다고 하면서 며칠 후에는 방콕으로 간다고 했다. 이제 WTO체제하에서는 동네 축구는 물론이고, 아시안게임도 아닌 올림픽 수준이 되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한다. 무한경쟁의 지구촌시대에 팔공산자락 운운하거나 TK정서가 어쩌니 하는 차원을 넘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 싶고 지금 생각해도 멋진 여행이었다. 1995. 9
최종편집:2024-05-28 오전 09:5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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